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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련해체(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49년11월21일
서울 시천교당은 격렬한 노성이 장내를 휩쓸었다.
『안됩니다. 이 나라를 건국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공헌했는데 누가 감히 학련을 해산하란 말입니까.』
경북 학련 위원장 손문창이 「마이크」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이어서 등단한 임관모(여수학련위원장)도 『아직 공비들이 득실거리는데 학련을 해체하면 우린 어디로 가느냐』고 반대발언을 했다.
이날은 전국학련 제5차 대의원 대회 날이자 학련해체를 결의하는날. 여느때와 달리 단상은 초라했다. 학련행사때마다 나와 격려하시던 김구선생은 4개월전인 49년6월26일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시고 인촌·조소앙선생이 계시지만 이미 야인생활에 들어가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이승만박사는 이미 학련과는 담을 쌓고 계셨다. 오직 백남훈선생·김준연의원 그리고 정부측에선 안호상문교부장관이 나왔다.
그러나 안박사도 「여러분의 업적은 위대하다. 그러나 이제 신생독립국가의 밑거름으로 학도·호국단에서 일해 달라』는 치사를 하다 야유가 터져 퇴장하고 말았다.
장내는 뜨거운 열기가 물결치고 밖은 더욱 소란하였다.
학련이 해체된다는 소리를 듣고 수많은 맹원이 몰려와 일대 시위를 벌였다.
군산학련 위원장 고병조가 나가 또다시 울부짖었다.
『보십시오 밖의 맹원들은 학교 수업을 중단하고 뛰어와 지켜보고 있소. 학련 해체를 좋아할 사람은 김일성뿐이오.』
나는 몇번인가 필서를 잡으려 했지만 설득이 통할 분위기가 못됐다.
목포학련 위원장 김귀진이 나의 발언을 두둔하다 오히려 멱살을 잡혔다. 학련 해체를 들고나오면 역적(?)으로 몰리게 됐다.
나는 할수 없이 정회를 선포하고 안호상 장관실로 달러갔다.
그러나 안장관은 『중요한 역사의 고비야. 학련도 새옷으로 바꿔 입어야지-』하며 학도호국단 간부에 전부 학련생을 기용할 것만을 약속했다.
하오2시 회의를 속개했다. 그러나 경남학련 위원장 한남이 해체반대의 혈서를 쓰고 『갈사람은 가라, 우리끼리 법통을 지키겠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장내는 다시 수라장이 됐다.
최창옥양(이화)은 남자들의 배짱 없음을 성토하고 『나는 여자의 몸이지만 학련의 깃발아래 목숨을 걸겠다』고 호소했다.
장내는 완전히 울음 바다가 됐다. 어려운 순간이었다.
지난 4년동안 우리는 얼마나 뜨겁게 싸웠던가.
반탁의 비보가 날아든지 1천4백5일 동안 얼마나 모진 어려움을 겪고 뛰어다녔던가.
입술을 깨물며 단상에 나가 호소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학련의 해체를 반대한다. 여러분의 심정이 내 심정이며 곧 전체 학도의 뜻이라고 알고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결단의 시기에 섰다. 역사는 전진한다는것을 명심하자. 비록 학련이 해체된다해도 반탁과 건국의 터전을 닦은 우리의 투쟁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나 역시 울고 모두다 울었다. 「반공 유공자 표창」이 있을때 장내는 다시 울음바다가 됐다.
표창장은 안호상문교부장관이 학련에 전달해온것.
본래는 대통령의 표창이 있기로 했으나 그것은 각의의 의결을 거쳐야하는 절차상의 문제로 문교부가 주는 표창으로 대신했다.
경기 이계송 권명하, 강원 박흥근 정진방, 충북 김진영 유대혁, 충남 공병주 최극, 전북 고병조 박이환, 전남 장충식 김귀진, 경북 제상률 손문창 문순구, 경남 한남 구흥렬 박후식, 제주 김호산 그리고 여자부에 황순임등 1백6명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뜨거운 눈물이 상장에 얼룩졌다.
마지막으로 송원영군의 제의에 따라 「반탁동지회」를 구성하고 다함께 전국학련의 노래를 불렀다.
『3천만 겨레들의 부르심을 받은 조국의 용사들아 백만 학도야. 창과 검 태극기를 움켜쥐고서 노예의 무덤에서 부활을 하자. 탁치와 38선을 분쇄하면서 자유가 아니거든 죽음을 달라. 혜성들 뭉치어서 전국 학련은 승리로 승리로 진격을 한다.』 김광주작사 현제명작곡의 이 전국학련노래는 멀리 멀리 퍼져갔다.
전국학련은 이렇게 해서 해채됐다.
그러나 중앙에서 해체결의를 했을뿐 지방에선 계속 간판을 내리지 않고 그후 6·25가 터지자 「학련구국대」회 결성, 전선으로 뛰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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