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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1481) 제47화 전국학련(93)|나의 학생운동 이철승|「반민법철회대회」로 경찰·학련 대립악화|「반정부음모」혐의씌워 경찰에 연행|경찰이 조작…집에 고구마(독)까지 갖다놓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48년11월3일 새벽 대문 부서지는 소리에 잠이 깼다.
경찰 수십명이 몰려와 문을 열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중 몇명은 옆집 담위에 올라가 총구를 겨누고있었다.
그때 내 숙소는 학련뒤 김창희양(학련여학생부장) 집.
이내 들이닥친 경찰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끝내 나는 찾지 못하고 경찰은 김양만 연행해갔다.
퍼뜩 어제 일이 생각났다.
단골집인 안동식당(현 신민당사 옆 양복점)에서 학련 간부들과 저녁을 먹는데 사복형사 수십명이 서성댔다.
뭔가 수상쩍어 알아보니 그저 특별경비중이라고 만했다. 그런데 바로 그자들이 내 숙소를 덮쳤다.
결국 먼동이 틀 무렵에는 나까지 잡혀 안국동파출소로 끌려갔다.
『영장을 내놓아라』고 항의했지만 무조건 상부지시라고 했다.
파출소엔 오홍석 조직국장(8대의원) 양근춘 총무국장(전민단조직국장) 홍관식감찰부위원장(제일생명부장) 이 이미 와 있었다.
오군과 홍군은 학련 사무실서 자다가, 양군은 삼청동 집에서 자다가 연행됐다.
학련의 핵심 「멤버」들이 잡혀온 것으로 봐서 뭔가 큰 문제가 터진것 같았다.
우린 대기해 놓은 「트럭」에 실려 시경(현「그랜드·호텔」주차장)으로 압송됐다.
이윽고 이덕원군(동대문학련위원장)까지 실려왔다.
상오 10시쯤 경찰은 또다시 「트럭」을 동원해서 오군은 용산서로, 이군은 중부서로, 홍군과 양군은 성동서로, 그리고 나는 성북서로 각각 분산 연행됐다. 경비가 이를데없이 삼엄했다. 그날은 마침 광주학생기념일, 좌익 소요에 대비, 예비 검속령을 내려 감방은 대만원이었다. 그런데 나만은 잡범을 몰아내고 독방에 넣었다.
그날 밤부터 취제가 시작됐다.
나의 죄명은 「반정부 음모 및 요인암살음모」혐의-.
이승만대통령, 이범석국무총리, 윤치영내무장관, 이구범수도청부청장, 노덕술전수도청사찰과장등 5명을 내가 암살하려 했다는것.
참으로 엄청난 조작극이었다. 경찰은 물증으로 권총 한자루와 「고구마」 (당시 수류탄을 고구마라 했음)한개를 내 놓았다.
권총은 내가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다 방아쇠가 부러져 지난 여름부터 집에 처박아둔 것이지만 수류탄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경찰은 나를 잡기위해 위인환이라는 전인천학련위원장을 매수, 그를 시켜 이덕원집에 수류탄 한개를 갖다놓고 그것을 찾아 물적증거인양 들이댔던 것이다.
문제의 위인환은 본래 일렬한 학련맹원으로 성품이 괄괄하여 김일성을 죽인다고 몇번인가 38선을 넘나든 일도 있다. 그런 그가 어쩌다 사람을 죽여 살인죄로 쫓기자 경찰은 그의 약점을 이용, 하수인으로 삼았다.
그가 이덕원집에 와서 수류탄을 맡길때도 『이건 김일성의 가슴을 때릴 것이야…』하며 억지로 맡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그 수류탄을 들이대며 자백을 강요했다.
그들이 이토록 엄청난 각본을 만든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신생정부의 조각에 관계되는 일.
48년 8월15일.
독립정부가 들어섰지만 당시 세논은 조각에 친일파가 너무 우대됐대서 불만이 컸다.
가령 국무총리설이 파다하던 김성수는 재무장관으로 내정되고 내무장관이 될것이라던 장택상은 외무장관이되고 외무장관설이 돌던 조병옥은 대통령특사로 떨어졌다.
이대통령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나 마찬가지야. 인촌은 사람이 착실하니 돈가방을 맡길만 해!』 하며 김성수에게 재무를 맡겼다한다.
그러나 김성수는 재무장관을 사양했고 그 자리는 곧 김도연으로 메워졌다.
『이박사의 총명이 흐려졌다』고 애국단체 대표들은 입을 모았고 나도 불만을 토로했다. 이무렵 경무대측근은 『자넨 시경국장을 하든지 외국유학을 가라』 고 종용했다.
나는 두가지 다 거절했다. 나는 괜찮으니 친일파만 제거해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이점이 친일파경찰에게 찍힌 첫째 이유다.
상황이 이런데다가 단순반란사건의 대책을 짜기위해 앞서10월23일 중앙청회의실에서 전국애국단체대표 의합이 있을때 이덕원동지가 대통령 면전에서 친일파를 매도했으니 순탄할리가 없다. 게다가 「경찰의 시민강제동원 규탄사건」으로 학련과 경찰이 대립하는 사태를 가져왔다.
국회에서 「부일협력자」 처단을 골자로하는 「반민법」이 통과된 직후 서울운동장에서 「반공시민궐기대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 반공대회가 갑자기 「반민법 철회대회」로 둔갑했다. 반공의 기치로 시민을 모아놓고 「반민법 철회」를 결의해버린 것이다.
이 문제는 국회에서 큰 논란거리가 됐다. 이때 학련의 여홍로 동지가 단회 내무위에 증인으로 나가 진상을 소상히 밝히며 경찰의 강제동원사실을 폭로해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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