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with] 유은비 씨의 VJ 체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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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 m-net의 "닥터 노의 즐길 거리" 촬영 중인 유은비(左)씨.

대학을 졸업했으나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백조' 유은비(23)씨. 한양대 학생 홍보도우미 등 학창 시절엔 꽤 잘 나간다고 자부했는데 세상사는 그다지 녹록지 않다. 그래도 '방송인'이 되고픈 꿈을 포기할 순 없다. 짧지만 케이블 TV에서 3개월간 리포터도 해 보았다는 '준 프로 방송인' 은비씨가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 m-net에서 일일 '비디오 자키(VJ)'를 체험했다. 정말 이 분야는 '올인'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또 그만한 끼와 열정은 있는지. 그녀에겐 어쩌면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정리=최민우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 훈련도 없이 바로 현장으로

오전 10시.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손질하고 메이크업도 제대로 했다. 오랜만에 방송 출연, 이 정도 센스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서울 강남구 청담동 m-net 본사로 찾아갔다. "그렇게 입고 오시면 추워서 고생하실 텐데…." 방송국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찬다. TV에 활발한 모습으로 나오기 위해 반소매 차림으로 입고 왔는데 "스튜디오가 아니라 주로 야외 촬영"이란다. 날씨도 쌀쌀하던데 너무 오버 했나?

VJ 오지은(25)씨를 만났다. 선배로서 이런저런 교육을 해줄 줄 알았는데 "이 바닥에선 준비된 사람만 원한다"라고 잘라 말한다. "저도 4년 전에 m-net VJ 공채 9기로 입사했는데, 합격한 지 1주일 만에 바로 생방송에 투입하더라고요. 교육이고 뭐고 없어요. 현장에서 엄청 깨지면서 배우는 거더라고요."

다만 VJ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었다. "우선 책을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으세요. 아무리 통통 튀는 VJ라도 의사 전달은 기본이니까요. 음악을 두루 알아야 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다만 연예인이 되기 위한 중간 단계로 VJ를 선택하는 건 권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성공하는 사람도 별로 보지 못했고요."

*** "나도 엉터리인데 가르치긴 뭘 … "

점심 식사 후 오늘 출연할 '닥터 노의 즐길 거리' 제작진과 미팅. 닥터 노 노홍철(26)씨는 방송에서 보던 대로 정신 없었다. "어 은비, 몇 살이지?" "스물 셋인데요." "내가 오빠네. 좋아 가는 거야."

대본을 받았다. 열심히 읽고 있는데 하민숙 작가가 말한다. "보실 필요 없어요. 무작위로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데 대본대로 갈 수 없잖아요. 그냥 설정만 나와 있으니깐, 현장에서 부딪치는 대로 진행해야 돼요."

난 스튜디오에서 예쁘게 포즈 취하고, 발랄.깜찍.상큼하게 진행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건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다. 내가 괜히 프로그램 망치는 건 아닐까. 노홍철씨에게 고개를 푹 숙이고 부탁했다. "잘 좀 가르쳐 주세요" "뭘 가르쳐요. 저 발음도 안 되는 거 보시잖아요. 그냥 내키는 대로 하세요."

***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로 나섰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대고 얘기를 나누다 신청곡을 받는 포맷이다. 난 낯을 가려 말 붙이기도 힘드는 데 노홍철씨는 뻔뻔하기 그지없다. "패션 죽여. 좋아 좋아-. 언니들 어디로 가는 거지" 처음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조금 보니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 같은 게 있다. '좌충우돌 카리스마'랄까. 자세히 보니 순간순간 순발력도 뛰어나다. 직업.의상.시사.액세서리 등 상대방의 특이점을 파악하며 대화의 맥을 조금도 놓치지 않는다.

드디어 내 차례. 낯선 남자 두 명과 함께 서 있으니 좀 어색하다. "컷! 다시 가죠." PD의 목소리가 냉랭하다. 그래도 자꾸 화제를 새롭게 만들지 않고 옷 얘기만 갖고 질질 끈다. 그러다 갑자기 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하이 서울' 액세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 이게 뭐예요. 어쩜 이렇게 귀엽죠?"

녹화가 다 끝나고 PD의 한마디. "아까 액세서리로 얘기 풀어간 거 아주 좋았어요. 관찰력도 VJ의 중요한 덕목이죠. 언제나 이야기의 '연결 고리'를 생각하라. 방송인이 되고 싶다면 명심하셔야 할 사항입니다."

세상 일이 다 내 맘 같진 않다. 내가 '순발력'이 얼마나 떨어지는 지도 뼈저리게 느낀 하루다. 그래도 부족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련다. '방송'은 내 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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