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학연<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남기고싶은 이야기들(1440)<저자·이철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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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메이·데이」격돌>
46년2월20일께 학연본부에 한 장의 긴급전보가 날아왔다.
발신인은 광주 장충직, 내용은 반탁학련 광주연맹을 결성코자하니 본부지원을 요망한다고했다.
학연본부를 결성한지도 얼마 안 되고 1·18사건의 뒤치다꺼리로 몹시 분주했던 때. 그러나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의견이 백출했다. 『지방조직은 시기상조다』『지방조직도 착수해서 경향이 협공해야한다』는 것등.
나는 가능한 지역의 조직을 착수, 반탁운동을 더욱 강화할 셈으로 2월25일 호남선 열차를탔다.
일행은 최찬영(경전·반탁선전부장) 조한원(법전·조직부장) 김득신(연전) 김진철(감신) 그리고 중등부에 노진환 백완 김상종 군 등.
광주를 학련의 지방조직 제1대상 지역으로 삼은 것은 광주가 항일학생운동의 발상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큰 이유도 없지 않았다.
남한 공산당 우두머리 박환영이 해방 전 3년 동안 광주 월산 벽돌 공장에 숨어 지낸 관계로 전남은 한때 「전남인민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공산「푸락치」가 많았다.
민족진영의 전위부대인 반탁학련이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
오후 5시께 광주역에 도착하니 서중의 장정식(광의전·광주 장안과원장) 장충식(한은검사역) 이은택·박철(공화당원내부총무)군 등과 차영후(6·25당시 사망) 정근(이상 광농) 조옥순(전남여중)등 남녀학생 1백 여명이「반탁승리」의 「플래카드」까지 들고 나와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우리는 서로 초면의 사이지만 백년지기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장정식·충식형제 집에 여장을 풀고 즉각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했다.
숙소를 장동지 댁으로 한 것은 좌익「테러」를 방지키 위한 장동지의 부친 장병상씨(당시 광주역장)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당시 나는 좌익 「테러」의 표적이 돼있었다.
나는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고 반탁 건국투쟁에 있어 호남학도의 역할을 강조했다.
광주동지들은『당신은 고군분투하던 우리에게 백만의 원군』이라면서 반탁투쟁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
이렇게 하여 2월26일, 광주중앙국민학교 강당에서 8백여 반공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반탁광주학연이 결성됐다.
위원장 이은택(서중) 부위원장 겸 조직 부장 장충직(서중)감찰 부장 차영후(광신) 여자부장 김미향(전남여중) 등으로 진용을 갖췄다.
항일운동사에 빛나는 광주학생 운동의 후예답게 전국서 제일 먼저 지방조직을 완료했다.
다음은 목포, 목포는 호남의 관문으로 해방 후 공산세력이 그 어느 곳보다 드세었다.
가령 45년10월, 미군이 목포에 진주할 때 정천·김영술(이상목상) 현춘득·표세종(이상목중 현 조련간부)등 좌익학생들이 게양중인 성조기를 끌어내려 찟어버릴 정도.
다행히 김귀진·간우면·윤신호·차순자·이지순·문송암등 애국학생들이 이남규목사(제헌의원)를 중심으로 공산세력과 맞서 3월6일 평화극장에서 목포학연을 결성했다.
위원장 김간규, 부위원장 김상졸, 감찰부장 서한태, 총무부장 김귀진, 계몽부장 오호석, 여자부장 이봉애.
이로써 「전남인민공화국」이라고 떠들던 반도남단에 강력한 우익의 전진기지가 마련됐다.
내가 광주에 머무르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일은 현준호(호남은행창설자) 고광표(전남석유사장) 오상현씨등 쟁쟁한 호남유지들이 애국성금을 보태주던 일. 또 하나는 광주방송위과 「수피아」여고에서 연설하던 일이다.
그러나 우익이 억세면 역시 좌익도 억센 법.
46년5월1일,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5월1일은 광주서중의 개교기념일이자 세계노동자의 날이라는 「메이·데이」였다.
서중생들은 당시 좌익의 맹휴로 수업이 중단돼 있었지만 교정에서 기념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좌익학생들은 모교의 기념행사에는 나오지 않고 공산당 「전평」이 주도하는 「메이·데이」행사에 나갔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급기야 문병표·정용구·기효건·박대성(이상 전부 월북)등 좌익패거리들이 몽둥이·삽 등 흉기를 들고 서중을 습격해왔다.
이유는 맹휴 중인 학교 문을 열었다는 것. 대회장은 바로 수라장이 됐다. 우익 학생들도 『날아간다』는 주먹들이 있었지만 느닷없이 닥친 기습에 손을 쓰지 못했다.
유하영·김문수 등 20여명은 몽둥이에 맞아 쓰러졌다. 장충식은 실신한 채 기숙사에 감금당하고 말았다.
장동지는 광주학연의 선봉, 좌익은 집중적으로 그를 구타했다.
일단 물러났던 광주학련은 긴급비상을 걸고 피납동지 구출에 나섰다.
차영후·최명섭·김응걸·김봉호 등 2백여 명의 맹장들이 좌익학생들과 피나는 백병전을 벌인 끝에 피납동지를 구출하고 서중을 재탈환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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