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을 「의」위에 좋은 것은 유교적 잔재"-중공의 『수호지』비판…그 내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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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 23일 북경의 광명일보는 모택동의 애독서라는 중국 고전소설 『수호지』가 연달아 일어나는 농민 봉기를 교묘히 진압시키기 위한 봉건 지배 계급의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통렬히 공격했다.
연이어 중공의 주요 언론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인민들에게 반 수정주의 운동의 기본 교재로 삼아 수호지에 대한 토론을 심화시킬 것을 촉구했다.
중공 언론의 비판 내용은 대체로 명대의 봉건지주 계층이 송대 말기에 실재했던 송강 일파의 「농민봉기」의 혁명성을 은폐하고 자기네의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시대적 요청에서 천자에 투항한 송강을 지나치게 미화하여 각색한 것이므로 인민들이 이를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명일보는 농민 봉기에 편승했던 송강이 양산박에서 지도권을 확립한 후 이전의 「취의청」을 「충의당」으로 개명, 농민군의 혁명 노선을 철저히 변질시켜 버렸다고 비난했다.
즉 농민 상호간의 원조·일치단결 및 봉건 압제에 대한 반항을 못하는 「취의」를 버리고 「충의」로 대체 함으로써 「의」를 봉건 왕조의 최고 덕목인 「충」에 중속시켜 「의」본래의 뜻을 완전히 잃게 했다는 것이다.
또 유교 사상에 깊이 물든 송강 등의 수정주의자는 반드시 투항파의 길을 걷게 되어 결국에 가서는 혁명을 팔아먹은 노소기와 임표 같이 된다는 것이다.
소설 구성도 명대 이후의 봉건 지주 계층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농민 봉기를 암살시키려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송강 등의 투항에 초점을 맞추어 각색된 것으로 근본적으로 봉건 왕조사회의 존속에 봉사하는 「천명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수호지가 묘사하고 있는 송강과 간신인 고구의 대결도 결국은 지주계층 내부의 파벌 투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농민 봉기군이 이용당했다고 지난 31일 인민일보에 전재된 중공당 기관지 「홍기」의 단정 기사가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지주 계층의 근본 이익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천자의 존재가 필요하고 또 농민의 천자에 대한 충성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송강은 농민 봉기군에 가담한 것처럼 가장, 그들의 신임을 얻은 후 천자에 투항한 것이고 후세의 지배 중은 이같은 「투항」을 선양치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어왔던 중공당국의 수호지 비판론은 첫째 탐관오리에 반항했던 흑선풍 이달를 대표로 하는 농민 봉기군의 혁명 노선을 부정하고 유교 이념을 신봉했던 송강의 투항 정신을 찬양했다는 점.
둘째는 송강이 농민 봉기군에 뛰어들어 혁명의 영향력을 더 파급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농민 봉기군의 품격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는 점.
세째는 수호지가 농민 봉기의 반봉건 행동을 찬양하고 있지만 또 송강을 통해 유교 이념을 선양하고 있다는 점 등 이었다.
현재의 비판은 주로 첫번째의 비판 입장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는 이미 1920년에 유명한 작가 노신이 『건달의 변천』에서 『송강 등은 천자에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사를 받고 귀순, 조연의 명령으로 다른 산성 퇴치에 힘썼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지주 계층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라는 평가를 반세기가 지난 현재 다시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또 73년에도 산동 대학 학술지 『문사철』도 수호지의 투항자세를 비판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번 사대는 개혁 이후 되풀이되어 온 대중교육 운동의 하나에 지나지 않고 어떤 새로운 운동, 혹은 모종의 권력 투쟁설의 전조라고 보기에는 아직 이를 것 같다.
금년 초 요문원 중공당 정치국원이 『임표 도배들의 사회적 기반』이란 논문에서 『「부르좌」들의 자본주의적 질서복구 활동의 목표는 그들이 박탈당했던 생산 수단을 되뺏는데 있지 않고 그들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생산 수단을 장악하려는데 있다』고 강조하면서 「프롤레타리아」혁명 정신의 대중 교육 운동을 심화하도록 촉구했던 것과 이번 운동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최근 수개월간 항주 등 일부지방에서 『송강류의 「부르좌」』들이 노동자·농민들을 꼬드겨 대소요가 일어 군부대까지 투입했다는 중공측의 주장을 상기한다면 이번의 수호지 비판의 역사적 배경은 뚜렷해진다.
왜냐하면 수호지는 중국에서 명대 이후 농민들 사이에 악정에 항거하여 간신배와 싸운 『농민의 투쟁력』의 귀감으로 널리 읽혀왔는데다 문혁 이후에도 당국이 허용한 소수의 책 가운데서 인민들 사이에 가장 인기를 누려 이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종래의 미온적 견해에 통렬한 반격을 가함으로써 중공 지도자들이 일부 수정주의자들의 꼬임에 빠져 소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는 다수의 농민 대중을 자각시킬 수 있는 가장 생생한 교재라고 평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수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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