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맹의「에티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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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가하는 국제회의의 수는 해마다 늘어난다.
지난 72년에는 74개나 있었다. 올해는 이보다 10개가 더 늘어날 것이 예상되고 있다. 나라사이의 관계가 그 만큼 친밀해진 것은 아니다. 문제들이 그 만큼 많아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국제회의가 다 중요한 것도 아니다. 열기로 기왕에 작정했으니까 열 정도의 형식적인 것도 많다.
국제회의라고 좋은 말만 오가는 것도 아니다. 격한 감정으로 욕설이 오가는 경우도 많다. 속으로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미워하면서도 겉으론 미소를 나누던 19세기 식 외교의례도 이제는 온데 간데 없어졌다. 외교가 그 만큼 거칠어진 것이다.
국제회의 중에서도 가장 거칠기로 이름난 것이 비동맹회의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유고」의 「티트」, 인도의「네루」, 「이집트」의 「나세르」등이 이끌었을 때의 비동맹은 이미 아닌 것이다.
지난 73년에 「알제리」에서 제4차 비동맹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다. 중공을 업고 나온 「캄보디아」의 「시아누크」가 소련을 비난했다. 그러자 「쿠바」의 「카스트로」가 소련을 지지하여 양자사이에는 격한 욕설이 오갔다.
원래는 어느 국제회의에서나 암호와도 같은 외교사령이 쓰여진다. 가령 중앙기획경제는 공산국을 말한다. 시장경제는 자유주의국가를 뜻한다.
『정치적 의사가 없다』는 것은 어느 나라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하려 하지 않을 때 쓰이는 표현이다. 발전도상국이라는 말도 국제회의를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이렇게 상대방의 비위를 최대한으로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외교의 「에티켓」이다. 가령 반대한다고 할 때에도 그냥 반대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는 찬성한다』고 말한다. 『시기상조』라는 말도 자주 쓰여진다.
「키신저」의 탁월한 외교역량도 사실은 이런 「에티켓」을 지키면서 쌍방의 비위를 잘 맞추는 솜씨에 있다.
이런 「에티켓」이 비동맹회의에서는 빈번히 무시된다. 여기서는 세련된 외교가 필요 없는 것이다. 이른바 제3세계의 힘의 과시만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리마」에서 열렸던 비동맹 외상회의도 마찬가지다. 한국 측 주장의 관철이 거의 낙관시 된다는 것이 어제의 외신보도였다. 그게 불과 한 두 시간사이에 뒤집혔다.
월남대표의 지극히 악의에 찬 감정적인 격론이 회담장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후에는 아무도 반론을 펴지 못했다. 모두가 완전히 군중심리에 사로 잡혔다고 할까.
그래도 우리는 처음으로 호랑이 굴속에 뛰어든 셈이다. 당초부터 호랑이를 잡을 수는 없었다. 비동맹을 주름잡고 있는 조정위원 국의 17개는 「알제리」·「쿠바」등 한국과 비 우호관계에 있는 나라들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별 상처 없이 호랑이를 길들이는데 성공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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