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교회구조 통해서만…|조동진 목사 <서울 후암교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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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금 기독교 세계에는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양길을 걷고 있는 전통적인 서구 선교세력을 대체하려는 「아시아」를 중심한 제3세계의 새로운 선교세력이 등장, 2백년기독교 선교사에 일대변혁이 일고있다..
이 새로운 선교세력은 일방통행 적이었던 서구선교의 갖가지 폐습을 과감히 단절시키고 자생적인 선교신학을 정립하고 동서양 쌍방이 통할 수 있는 공동의 선교의 교차로를 닦아나가고 있다.
2백년동안의 서구 선교가 서구 제국주의 정책과 직접·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과거 식민주의를 깊이 반성하고 제3세계를 위한 선교신학으로 만들어낸 소위「해방의 신학」역시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명 혁명신학. 정치신학이라고 불리면서 특히 60연대후반부터 세인의 이목을 크게 끌었던 서구의 「해방신학」은 성경의 근거가 희박했을 뿐 아니라 서구인들 자신의 환경과 개념에 의한 창작이었기 때문에 제3세계에서의 적용에 많은 혼란과 긴장만을 초래한 게 사실이다.
이 같은 정치적인 자유주의신학은 구약의 「이스라엘」민족사에 약간 비친 것을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에서는 좀 체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눌린 자의 해방」을 부르짖는 행동주의 신학이고 전략과 전술을 완전 정립한 것은 73년 「방콕」WCC선교회의에서였다.
서구 선교가 과거를 반성하고 선교방향을 바꾸는 것은 좋았지만 과격한 행동으로 나서 선교의 개념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시켰던 것이다.
즉 제3세계에서의 자생적이 아닌, 이 선교신학은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를 탄생시킬 우려를 낳게 했고 본래의 기독교적 선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정부와 선교간의「스트레스」·잡음 등만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해방신학이 내세우는「하나님의 선교」는 어떤 사회 조직이라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 교회 적인 조직에 마구 뛰어들었다.
따라서 원래 기독교선교의 원단인 「바울」의 선교, 즉 십자가의 선교와는 달리 노동운동이나 정치운동, 모든 사회행동까지 관여하는 탈선과 혼미 속에 빠져들었다.
기독교 선교는 적어도 기독교를 신봉하고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 구조를 통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당초의 출발부터가 선교의 원칙을 뛰어 넘은 행동주의 신학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탈선할 위험성을 내포했던 것이다.
어쨌든 현대기독교 선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본래의 성서적인 십자가의 선교와는 달리 「인간이 하나님이 된 인상」을 짙게 풍겨온 게 사실이다. 더욱이 혼란을 거듭하는 선교개념 속에서 심지어 계속적인 욕망에 탐닉한 비 기독교적인 자들까지 선교를 들고 나오는 사태도 없지 않았다.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하는 것이지 사회 속의 모든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또 한번 증명해준 게 현대행동주의 신학이다.
특수한 명칭을 부여한 선교를 하면서 사회 속에 직접 뛰어든 선교신학이 적용된 제3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불필요한 긴장과 소동이 일고있다는 사설이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해 주는 것이 결코 선교가 될 수는 없다.
서구 해방신학이 아닌「아시아」자생의 선교신학에 바탕을 둔 제3세계 선구세력이 힘을 모으게된 것도 이러한 선교의 본질을 다시 찾고 아직 해방되지 않은 곳에 복음의 문이 열릴 것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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