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사태 방아쇠 당긴 사나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세르게이 악쇼노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은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보낸 그의 서한으로부터 시작됐다’.

 시사주간 타임이 10일 기사에서 지칭한 ‘그’는 크림자치공화국의 총리, 세르게이 악쇼노프(41)다. 그가 총리에 오른 건 지난달 27일. 취임 직후 그는 푸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크림자치공화국 영토의 안정과 평화를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러시아는 즉각 “(그들의 요청을) 못 본 척하지 않겠다”고 답했고 러시아군의 크림반도 점거가 시작됐다. 푸틴 대통령은 4일 만나 본 적도 없는 그를 크림자치공화국의 합법적인 총리로 인정했다.

 크림자치공화국을 러시아에 편입시키기 위한 악쇼노프 총리의 거침없는 행보가 이어졌다.

지난주 의회는 러시아 편입을 결의하고 주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자체 군대도 창설했다. 11일엔 러시아 경제권으로의 편입을 선언했다. 이타르타스통신에 따르면 그는 “두 달 안에 러시아 루블화(貨)로 전환하고 러시아 시스템에 맞는 금융체계를 확립할 수 있다”고 밝혔다. 크림반도에 있는 자원을 국유화하겠다고도 했다. 의회는 이날 독립선언서를 채택하고 공식 국명을 ‘크림공화국’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모두가 악쇼노프 총리가 취임한 지 보름도 채 안 돼 벌어진 일이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최대 위협이지만 총리가 되기 직전까지도 그는 존재감 없는 정치인이었다. 정치 이전의 이력도 불투명하다. 그는 1990년대부터 담배사업을 했다. 본인은 “담배를 팔긴 했지만 아버지의 공장에서 만든 우산이 주요 제품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역에서 그는 사업가라기보다 조직을 이끌며 담배를 밀수하던 범죄자로 알려져 있다. 부하들을 거느리고 갈취를 일삼았다는 증언도 나온다. ‘고블린(서양 동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이란 별명을 가졌다고도 한다.  

정치에 뛰어든 건 2008년이었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단체에 가입했고, 2010년엔 러시아통합당을 만들었다. 창당 후에도 그는 주변부 정치인으로 머물렀다. 당은 크림자치공화국 의회 의석 100석 중 3석을 차지할 뿐이었다. 크림자치공화국의 한 기자는 “6개월 전 악쇼노프가 총리가 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면 비웃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그의 움직임은 1월 시작됐다. 키예프에서 반정부시위가 한창일 때 그는 자경단을 조직했다. “반정부시위에 가담한 극우주의자들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다. 러시아통합당의 청년당원으로 구성된 자경단은 키예프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수천 명으로 늘었다. 지난달 말 심페로폴에 있는 크림자치공화국 의회를 점거한 무장병력이 그의 자경단이다. 이들이 악쇼노프 총리의 명령에 따랐는지 불분명하지만 점거 뒤 의회가 결의한 첫 번째 안건이 악쇼노프 총리 지명이었다.

 이후 상황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그가 러시아의 조종을 받는 인형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고 ‘어두운 과거’도 다시 거론되지만 장애물은 아니다. 여론도 “90년대는 누구에게나 어두운 시기였으니 상관없다. 지금 그가 하는 일만으로 평가한다”는 분위기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의 분리를 확신한다. 러시아에 편입되지 않더라도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준(準)독립국이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홍주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