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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여행, 근대로의 시간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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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방방곡곡 부지런히 답사를 다녀본 이들에게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제야 난생처음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을 다녀왔다. 듣던 대로,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의 산길은 초록이 제철이 아닌 요즘도 아름다웠다. 주변 숲엔 붉은 동백이 한창 피어났고, 후세에 지어놓은 누각에서 내려다본 강진만의 바다는 연푸르게 반짝였다. 다만 말로만 듣던 것과 달리, 산길을 오르내리는 게 제법 숨이 찼다. 이런 산길을 다산은 백련사에 머물던 친구 혜장선사를 찾아 몇 번이고 오르내렸을 터다. 그의 오랜 유배 생활, 벗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떠올랐다.

 내친김에 목포와 군산에 들렀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실학에 몰두했던 때로부터 한 세기 안팎이 흐른 뒤,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래 근대사의 흔적이 여럿 새로 조명되고 있는 지역이다. 목포 유달산 밑에 자리한 근대역사관 본관은 지난달 말 정식 개관식을 열었다. 100여년 전 일본영사관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이제는 일제강점기 목포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공간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가까이에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도 있다. 한반도 수탈의 첨병 노릇을 했던 기관이다. 이 역시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는 중이다. 군산에는 아예 근대역사문화지구가 형성돼 있다. 21세기 양식으로 새로 지은 근대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제법 오래된 건물이 여러 채 모여 있다. 그중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한때 대형 유흥업소로 쓰이기도 했던 것을 복원해 근대건축관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 주변에는 채만식이 1930년대 발표한 소설 『탁류』에서 모티프를 얻은 조형물을 비롯, 군산을 배경으로 문학과 역사가 만나는 스토리텔링을 풀어놓은 볼거리도 여럿 눈에 띈다. 요즘 젊은 여행객들 사이에 군산이 명소로 떠오른 이유를 짐작할 만했다.

 사실 일제강점기의 건축은 오랜 논란거리다. 김영삼 정부 시절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한 무렵의 논쟁이 대표적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다는 듯, 군산과 목포에 새로 복원된 근대건축은 각 항구를 중심으로 일제의 수탈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당시 생활상이나 항일운동 자취와 함께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도록 단장되어 있다. 한때는 청산해야 할 일제 잔재, 혹은 철 지난 흉물이었을지도 모를 건축물이 말 그대로 역사교육의 현장이자 새로운 문화인프라로 거듭난 것이다.

 역사학자 E H 카의 말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과거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꺼내 어떻게 들려줄지는 온전히 지금 사람들의 몫이다. 앞서 안내문을 보니 다산초당도 기와를 얹은 지금 모습 대신 ‘초당(草堂)’이라는 본래 이름대로 다시 복원할 계획이 있는 모양이다. 당대의 실학자들이 좇았던 실사구시의 정신은 근대사의 고통스러운 자취를 새롭게 활용하고 조명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인 듯싶다.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