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들 "일단 피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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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 있는 주물업체 C금속의 金모(40)사장은 최근 외국인 노동자들이 잇따라 잠적해 골치가 아프다.

지난해 말 이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는 14명이었지만 최근 5명이 소리없이 사라졌다. 金사장은 "남은 인력을 주말 잔업까지 시키고 있지만 다음달 초 납품기일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3년 이상 불법체류자들의 강제출국 시한으로 정한 3월 말이 다가오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업장에서 속속 사라지고 있다.

실제 단속은 당분간 연기될 조짐이지만 불법체류자들은 언제 단속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작업장을 빠져나와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숨고 있는 것이다.

반월공단의 염색업체 T사도 총 15명의 외국인 숙련공 가운데 9명이 이미 지난달 말 출국하거나 잠적했으며, 공작기구 제조업체인 D업체도 13명의 외국인 숙련공 가운데 6명이 최근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의 박천응 목사는 "이달 들어 외국인 좀 구해달라는 사업주들의 부탁 전화가 하루 20여통씩 걸려오고 있다"면서 "중소기업은 한 두명만 빠져나가도 작업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사업주들이 애를 태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D업체의 李모(43)부장은 "몇년씩 기술을 배운 노동자들을 전부 내쫓고 처음부터 새로 가르치며 일할 순 없는 일"이라며 "내국인은 어차피 오지 않는 3D 직종인 만큼 외국인들이라도 맘 놓고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 남동공단.부천공단 등 다른 지역의 상황도 비슷하다. 부천외국인노동자센터에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 당분간 피신이라도 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외국인들의 상담 전화가 잇따르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잠적하는 이유는 지난해 불법체류자 자진신고 때 기재했던 집.사업장 주소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단속에 걸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불법체류자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 일자리를 구하거나, 일을 중단하고 주소 파악이 잘 되지 않는 '벌집(빈민가 단칸방)' 등지로 숨고 있다.

서울 구로공단에서 일하고 있는 중국동포 張모(45)씨는 "다음달부터 실제 단속이 시작된다면 서울 변두리 지역의 벌집에 숨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6년 관광비자로 입국한 뒤 5년째 불법체류 신분으로 C금속에서 일하고 있는 한 방글라데시인(32)은 "그냥 가만히 있다가 단속에 걸려 강제출국되는 꿈을 매일 꾼다"면서 "하지만 공장을 옮기는 사람만 골라 단속할 것이란 소문도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그동안 단속한다고 해놓고도 수차례나 물러선 전례가 있기 때문에 불법체류자들은 이번에도 자진출국보다는 잠시 잠적하며 버티고 있다. 시민단체에 따르면 15만여명에 달했던 3년 이상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실제 출국한 사람은 20%에도 못미친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불법체류자의 강제출국을 적극 추진했던 법무부는 일단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고용허가제 법안이 다음달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때까지 단속을 잠시 유예하겠다"며 한발 물러서 있는 상태다.

그러나 법안을 놓고 여야 입장이 엇갈리는데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측에서 임금상승 등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나타내고 있어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양혜우 소장은 "불법체류자 전원 추방이 불가능한 만큼 외국인에게 근로자 신분을 줘 기업이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고용허가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동기.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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