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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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야사를 보면 신숙주선생은 별로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이 어린 단종에 대한 숙부 수양대군의 처사는 왕실의 일대 비극이었다. 신숙주선생은 바로 그 정변에서 지모를 발휘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당대의 지식인으로 현실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 놓았던 셈이다.
그러나 역사의 먼 지평 위에서 보면 그 평가의 시야는 한결 넓어진다. 한 인물의 생애를 다만 감상적인 눈으로 보는 태도는 마치 색안경을 낀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신숙주선생은 정치와 문필을 겸한 재능 있는 학자였다. 그는 20대의 나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다시 문과시험에 급제하는 등 각광을 받았다.
그가 학식을 쌓은 것은 집현전의 부수양으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장서각을 출입하며 당대의 명저들을 빠짐없이 섭렵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숙직까지도 맡아서 밤을 새우며 독파를 했었다. 세종도 그 소문을 듣고 어의까지 하사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처럼 열심히 공부한 보람은 그의 문장에 나타나 그 재능은 시야에 널리 알려졌다.
세종 때 김종서가 육진(지금의 함북)을 개척하려고 배변에 가 있을 때 매일같이 그 사정을 중앙에 보고해야 했다. 그때마다 문장에 능한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왕은 바로 그 일을 신숙주에게 맡겨 군사들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지시사항까지도 그의 문장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그무렵 육진 개척은 조정에서 시비가 많았지만 신숙주선생의 비범한 문재로 그 필요성을 세파하기도 했다.
수양대군과 신숙주선생의 기연은 명과의 외교관계로 비롯되었다. 수양은 명과의 외교가 순탄치 못해 스스로 그 나라를 방문했었다. 집현전 교리인 신숙주는 이때 수양을 수행했다. 그의 재질을 인정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외교적 수완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빛을 냈다. 그는 일본에 대해서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그 관계를 몹시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임종에 이르러 성종에게『일본과의 화친』을 호소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오늘의 안목으로 보아도 의미 있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숙주선생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훈민정음의 창제에 깊이 관여한 일이다. 그는 음운에 정통한 식견이 있었으며, 당시 요동에 유배 중이던 명의 한림학사 황찬을 열세번이나 찾아가 막자음운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그의 공적은 우리문자와 함께 잊혀지지 않을 일이다. 신숙주선생은 이른바 현실참여의 지식인으로 논란도 많이 샀지만 또 역사에 공헌한 바도 적지 않은 것이다.
29일, 그의 5백 주기를 맞아 후손과 후학들은 추념식을 가졌다고 한다. 새삼 역사의 한 「페이지」를 펼쳐 본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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