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지배시대는 지났다"-「앨러스테어·부칸」<영「옥스퍼드」대 교수·역사학>|논문 『인지전과 세계정치』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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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역사학교수 「앨러스테어·부칸」씨는 「인도차이나」 전쟁이 국제정치에 미친 영향과 이 전쟁으로부터 배워야할 교훈에 대해 『「인도차이나」 전쟁과 세계정치』라는 논문을 미국외교문제 계간지 「포린·어페어즈」 금년 여름호에 발표했다.
「부칸」교수는 월남전으로 국제적인 역관계가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며 이는 다만 역사의 한 단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이 논문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주>
역사를 논할때 어느 한 시기의 사건이라든가 이와 관련된 사건만을 가지고 만약 이러한 사건이 없었다면 세계정치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상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역사란 과거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미국의 월남개입을 두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하는 식의 역사서술의 대부분은 지난4반세기 동안의 역사의 한 시점에서 미국이 취했던 의사 결정의 「프로세스」를 부분적으로 추출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월남개입이 초래한 장기에 걸친 전과가 미국의 이상주의에 준 타격이라든가, 월남에서의 군학적·정치적 실패가 미국의 영향력에 미친 손해라는 것은 보다 큰 변화의 개개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거나 64년부터 73년까지의 기간동안 평화적인 해결에 성공했다 할지라도 세계의 역관계구조는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같은 발상은 「금릉의 미국이라는 환상」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1954년께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의 지위가 붕괴되면서 미국이 경제적으로 거의 이해관계가 없고 전략적으로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던 「인도차이나」에 개입한 이유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다. 당시 미국의 인지개입이유로 「이데올로기」, 일본의 확보, 「도미노」이론 등 세가지 측면을 열거할 수 있다.
즉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 「아시아」를 지켜야 한다는 결의가 그 하나이며 일본이 경제적으로 안정하는데는 동남아의 장래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또 하나이다. 일본이 동남아시장과 원료에 접근하는 것이 부정되면 만주진출이래의 모험을 또 되풀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또 1950연대 공산주의에 대한 동남아봉쇄전략은 원래 미국만의 발상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도미노」이론이라는 것은 54년 미국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지만 이미 1950년 「콜롬보」의 영 연방외상회의에서 영국관리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중공의 침투가 태국과 「버마」의 안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경고한바 있었다.
이보다 앞서 화란·「프랑스」·인도까지 같은 의견을 말한바 있다. 또 호주·「뉴질랜드」는 한국전쟁이래 공산주의의 동남아침투에 신청을 곤두세워 미국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손을 쓰도록 압력을 가했다.
따라서 미국이 동남아에 관여하지 않을 방침이 확고했더라도 연합국의 압력이나 간청에 저항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요컨대 미국이 애초 「인도차이나」에 강력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데올로기」적 입장이라든가, 세계에 대한 책임감 때문만이 아니라 타국과의 관계에 따른 그 이전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미국의 「인도차이나」개입이 모든 문제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시기에 어느 만큼 국제체제의 질적 변화의 주인이 되었는가 하는 의문에 조그마한 해답도 주지 않는다.
미국의 「인도차이나」 정책이 다소 일방적이었던 것은 54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의 월남정세는 비교적 평온했으므로 그 시기는 「케네디」 대통령이 「디엠」정권타도에 영향을 끼쳤던 62년11월부터 모호한 휴전이 실현된 73년에 이르는 미국개입의 절정기로 국한시켜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그 당시와 지금의 세계의 권력과 영향력의 구조를 비교하면 누구나 그 뚜렷한 차이에 놀라게 된다. 63년의 미국은 국가권력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흡인력이 가장 풍부한 사회였다. 전략무기면에서는 소련에 비해 10배나 위위에 있었다.
소련은 「쿠바」 위기로 타격을 받은지 얼마되지 않은데다가 새로운 국내정치위기를 맞았으며 중·소 분쟁은 그 첫 단계에서 긴박한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중공은 동남아일부에 극히 미미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EEC는 역내 무역장벽을 제거하는 의에는 거의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았었다. 모든 서구제국에 NATO동맹은 EEC이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세계는 변했다. 미국이 아직도 물질적인 면에서는 최강국이긴 하지만 소련은 핵 전력면에서 미국과 「대등」한 지위에 이르는 등 군사면에서 초대국이 되고있다.
중공의 국제사회등장 역시 이에 못지 않은 변화로서 미·중·소의 정치적인 삼각관계가 서로 밀접한 양수 관계로 성립됐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유럽」·「아시아」의 동맹관계에서 핵심적인 존재라는데는 변함이 없으나 NATO의 경우 그전과 같은 지배의 관계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의 미군의 감축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 결과는 결국 미국이 단순한 「태평양의 강국」으로 격하되어 한국전쟁이래의 지배적 위치를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될 것이다.
군사면 이외의 세력분야에서도 서독의 동방정책, 일본의 중·소 접근, EEC의 성장 등 동맹의 내부구조도 완전히 바뀌었다. 경제·통화 면에서 미국이 열세에 몰리고 국내 「인플레」의 가중으로 미국은 허덕이게 되었다. 미국의 월남전개입이 이러한 과정과 일치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국인들은 그들의 운명을 월남전이 바꾼 원흉이라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의 눈으로 볼 때 가장 기본적인 변화의 요인으로 월남전이 미친 영향은 아주 작은 부분이며 간접적으로 그쳤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70년대 후반들어 국제체제가 60년대에 비해 복잡하게 됐던 것은 중·소 분쟁과 비공산 세계, 특히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가 끝난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경제적 지위 약화는 60연대부터 70년대에 걸쳐 서구와 일본의 생산성이 미국보다 급속히 성장한 때문이지 월남전쟁에 의한 경제불황은 2차적인 문제이다. 아울러 미국사회가 지녀온 병폐를 월남전과 결부시켜보지 않을 수 없다.
60연대의 미국에 인종· 빈곤 등 국내문제가 폭발했던 것은 월남전쟁 때문이 아니라 그때까지 20여년 동안 정치지도자를 비롯한 「엘리트」들이 국내문제보다 대외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결과다. 월남전은 국내문제해결을 늦춤으로써 악화시켰을 뿐이다.
월남전이 미친 영향은 미국인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 미국이 할 역할이 무엇인지 사고방식을 재고하도록 했다는데 있을 것이다.
미국이 건국이래 최초로 고배를 맛보았던 이 전쟁은 미국 고유의 여러가지 국내문제의 현재화와 아울러 미국의 전략적·경제적 주도권의 상실과 시기를 같이 했다는 사실은 세계는 그들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월남전쟁은 요컨대 미국사회의 성격 및 다른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국민전체의 사고방식을 좌우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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