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학련(3)|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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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학병 지원제>
조선학도병 지원제는 1943년11월3일 그들의 천황탄생일이란 「명치절」에 맞춰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표됐다. 그동안은 국민총력연맹이니, 청년특별련성이니 하여 강제 노역등에 동원을 해왔으나 이제는 학생들마저 전장으로 몰아가는 폭거에 손을 댔다. 온 나라가 술렁였다. 대상이 대학·전문학교 재학생인데다 동원방법이 실제로는 강제였기 때문에 그 충격은 대단히 컸었다. 보전배속장교인 「가와모도」(하본·원래는 이라는 성의 조선인) 중좌는 한층설쳤다.
『이제 조선인도 일본인과 동등대우를 받게 됐어.』
『대동아공영을 위한 이 성전에 조선학도가 출정하면 그만큼 내선일체가 되는 거야.』그는 기고만장이었다.
당초 총독부의 발표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지원제」라 했다.
그러나 친일파의 자식들까지도 이핑계 저핑계로 지원을 거부하자 드디어는 각학교의 배속장교로 하여금 책임동원을 명령했다. 한편으로는 저명인사들을 총동원해 지원권유에 내세움으로써 강제동원으로 몰아 세웠다. 물론 고하 안진우선생처럼 병치료를 핑계삼아 지원권유를 기피한 경우도 있고 인촌 김성수선생(당시보전교장)처럼 『남의 귀여운 자식문제에 왜 내가 관여하느냐. 나는 그들의 교육을 맡았지 입영문제를 맡은게 아니다』라고 저항하며 뿌리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육당 최남선선생이나 춘원 이광수선생이 이른바 창씨개명한채 동경까지 건너가 조선유학생들에게 학병지원을 설득할 정도로 일제의 술책은 간악했다.
당시 보전법과2년에 재학중 이던 나는 비교적 정보에 빨랐다. 중경임시정부의 국내 연락책이던 장일환씨와 함상훈 원세훈씨등과 가까왔던 나의 숙부(이석주·제헌의원)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귀동냥을 할 수 있었고 인촌·운산을 찾아 뵐때마다 새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 일본 외교관이던 박석윤(일제말「폴란드」대사)과 장철수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고 단파 방송을 들어 정세파악이 빨랐다.
어느 날 인촌은 조용히 말했다. 『일제가 학병지원을 서두르는 것은 그만큼 전황이 불리하다는 증거야』 『그들은 이 기회에 교육받은 조선인의 씨를 없애버리려는 것 같아』 그러면서 『알아 듣겠지』하며 나를 응시하시는 것이 아닌가.
사태는 참으로 심각했다. 끌려가면 죽는 것이다. 살아 돌아올 가망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러면 도망칠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사귄 친구나 후배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렇게 나는 하루에도 두 세번씩 생각을 바꾸어가며 이른 새벽이나 늦은 저녁에 선후배댁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장기입원중인 안호상선생(당시보전철학교수)을 윤원구군과 문병차 찾아갔다. 학병얘기끝에 선생은 내귀를 끌어당기며 『패전이 확실해. 기피해!』하는 것이었다.
나는 드디어 거사할 결심을 굳히고 삼선교 내 하숙집 방에 윤원구·우택환을 비롯한 5, 6명의 동급생들을 불러모았다. 『우라가 바라는 것은 조선의 독립이다. 그런데 우리가 학병에 끌려가서 살아 돌아오려면 일본이 이겨야 되는데 그러면 조선의 독립이 안되고. 조선이 독립되려면 일본이 망해야 되는데 그러면 우리 목숨은 죽는 것이다』
『그러니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했다. 모두가 찬성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교내 학병해당자들을 개별접촉해 지원서에 도장을 찍지 말도록 권유했다. 다른 학교와도 연락, 공동보조를 맞추기 위해 서로 연고 있는 학교를 나누어 맡았다.
개별접촉결과는 만족할만 했다. 각 학교와의 연락망이 짜였다 싶은 어느날 오후 우리는혜화동에 있는 연희전문 대표 나군의 하숙방에서 각 학교대표 열댓명이 처음으로 비밀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우선 11월2O일로 예정된 마감날까지는 각자가 자기학교를 책임지고 맡아 거부운동을 펴고, 그후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 학생들이 연락책임을 맡아 제2의 3·1운동을 도모하자고 결의했다. 경성제대대표로 나온 이혁기군과 내가 연락책임자로 뽑혔다. 이군이 그당시 부터 여운형씨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는 것은 훗날에야 알았다.
우리는 암호도 쓰기로 하고 공작대상자 명단은 각급대표가 갖되 모자속에 감추어 넣어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암호는 동지와 적을 구분해 안심해도 좋은 사람이면 모자차양을 왼쪽으로 돌려 신호를 하든가, 경계인물이면 손을 모자정면에 슬쩍 올리는 등의 방법-. 만나는장소는 모일 때마다 바꾸어 비밀을 유지하고 단원의 가입이나 의사결정은 전윈 만장일치제로 했다.
또 죽을 때까지 서로 비밀을 지키자는 서약까지 했다. 실로 오랜만에 각 학교가 횡적인 조직을 갖게됐다. 그날이후 우리는 수차 비밀회합을 가졌다. 그때마다 자기 학교의 진척상황을 서로 보고하고, 그 대책을 짜는등 제법 독립투사들 같은 면모를 보였다. 그때 우리는 6할이나 7할이상만 학병거부에 동조하게 하면 일단 성공하는 것으로 보았다. 마감날이 가까워 지면서 당국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원강요를 한 까닭에 3할내지 4할정도는 불가피하게 지원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국의 강요가 극심해진데 따라 학생들의 거부하는 요령도 그만큼 결사적이었다.
당시 나의 급우이던 윤석헌(현 주불대사), 정기엽(실업인)군처럼 몸이 약한 친구들은 끌려가 죽으나 굶어죽으나 마찬가지라면서 죽자하고 단식을 해서 신체검사에 실격하는 요령을 부린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학병거부운동이 잘되는 듯 싶은 어느날, 그만 탈이 생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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