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공산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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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일본사람들은 묘한 데가 많다. 지난 32년5월에 반란자들이 수상관저에 몰려왔다. 당시의 일본수상 견양의는 『얘기를 나누면 서로 통할 것이다』라면서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반란자들은 두말없이 그를 쏴 죽였다.
이런 쓰라린 교훈에도 불구하고 일본사람들은 『아무나 얘기를 나누면 서로 통한다』고 곧잘 믿는다. 묘한 생리다.
최근에 일본의 창가학회와 공산당의 두 수뇌가 서로 얘기를 나누고 공산주의와 불법이 공존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창가학회의 지전회장은 늘 「불법자」임을 자처해 왔다. 또한 『사람은 얘기를 나누면 통한다』고 자신해 왔다. 그래서 최근에 모택동도 만나고 소련의 수뇌들과도 회담을 가졌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공산당이라도 같은 일본사람끼리 얘기가 안 통할 이가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쪽은 유심론, 또 한쪽은 유물론, 한쪽은 종교, 또 한쪽은 정치, 이런 양극의 공존이 정말로 가능할 것인지? 창가학회가 세운 정당인 공명당까지도 회장의 공존성명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모양이다. 종교가 정치와 반드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이상은 『장엄국토, 이익중생』에 있다고 불교에서도 믿고 있다. 이 세상을 훌륭하게 건설하고, 인민을 행복하게 만들어 놓는다는 뜻이다.
정치의 이상도 이와 같다. 그렇다면 종교나 정치나 다를 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창가학회에서 평소에 주장해 오던 것도 보살도다. 그것은 현실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혼탁한 속세 속에 뛰어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정말로 공산당과도 얘기가 안 통할 리 없다고 착각할 만도 할 것이다.
대담이란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인간적인 입김이 교류하기 마련이다. 더우기 본질적인 것을 슬쩍 우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래서 생기는 오해도 인간적인 것이라 해서 오히려 양해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서로 알고 있으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가령 일일불작 일일불식이란 불가의 말이 있다. 당대의 고승 백장한해의 명언이다.
예부터 선승들은 작무라 하여 근육노동을 일과로 삼고 있다. 백장은 80이 넘자 작무가 힘들어졌다. 그래도 일손을 멎지 않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연장을 감추었다.
하는 수 없이 백장도 작무를 중지했다. 그러나 그날부터 그는 단식에 들어갔다. 「일일불작 일일불식」 이것이 그의 이유였다.
불작불행을 하루라도 게을리 하면 차마 하루도 먹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그 참뜻이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 먹어서도 안된다는 뜻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걸 같다고 한 것이다.
얘기가 통한 것이 아니다. 서로의 타산에 의한 오해가 통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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