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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어진 1분 세상에 무엇을 말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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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강일구
강일구 기자 중앙일보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강일구]
주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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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교정은 신입생들의 재잘거림으로 수선스럽다. 갓 태어난 새들의 합창소리 같다. 불협화음이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활기를 잃어버린 늙은 새(재학생)들은 흘낏 보면서 지나친다. “좋을 때다.” 졸업예정자의 ‘거친 생각’ 속에는 회한이 담겨 있다. 임재범의 노래 ‘너를 위해’가 배경음악으로 적당하다.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방송사에도 낯선 얼굴들이 밀어닥쳤다. 신기한 듯 기웃거리는 저들. 신입사원들이다. 복도에서 연예인들과 마주치며 ‘살아남은’ 자의 기쁨을 만끽한다. “아 여기가 꿈의 공장이구나.” 청춘의 태반을 ‘시청률의 노예’로 살아온 은퇴예정자들은 창가에서 허탈하게 웃는다. “살아봐라.”

 실무면접에서 MBC 서창만 PD는 “아카데미 시상식 같은 프로를 연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시상식의 취약점들을 열거하며 안목과 정보량을 과시했다. 구체성, 준비성에 매료된 선배들은 사뿐히 문을 열어주었다. 십 몇 년이 흐른 후 ‘대한민국영화대상’ 자막에서 그 이름을 발견하고 20세기 말의 기억이 부활했다. 미소와 한숨이 교차하는 밤이었다.

 짜임새는 좋았으나 아쉬움은 여전했다. 수상자들의 소감이 별로였다. 연출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감격에 겨운 건 알겠으나 과연 저 말밖에는 할 게 없을까. 하느님과 가족, 제작진에게 고마워하는 것으로 주어진 1분을 다 써버리다니. 한국영화사에서 장미희가 했던 수상소감 “아름다운 밤입니다”는 불멸의 어록으로 남았다. 이후 인상적인 소감은 2005년 청룡영화제 때 배우 황정민에 의해 탄생했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것뿐인 걸요.” 겸손의 비유가 남달랐다. 감사의 리스트를 나열하다가 생방 시간을 잡아먹는 수상자들과는 급이 달랐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하는데 외국의 시상식을 볼 때마다 ‘졌다’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노예 12년’으로 흑인 최초의 작품상 트로피를 거머쥔 스티브 매퀸 감독은 주인공 솔로몬 노섭의 대사로 소감을 대신했다. “모든 사람은 그저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사람다운 삶을 살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세상의 모든 노예들과,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얼마나 깔끔한가.

 ‘노예 12년’을 제작한 브래드 피트는 프로듀서 자격으로 인터뷰 룸에 들어와 “역사를 바로 알아야 현재의 우리가 바로 설 수 있고, 나아가야 할 방향도 알게 되는 것”이라며 의미를 다졌다. 노예들은 1840년대 루이지애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 염전에도 수많은 ‘노섭씨’가 있다. 그들을 구한 후에는 우리 자신도 구해야 한다. 새장에 갇힌 줄도 모르고 오늘도 모이를 주는 손에 입 맞추며 노래로 화답하는 늙은 새들이 그들의 수상소감에 짧게나마 화답할 시간이다.

주철환 PD
일러스트=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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