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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 좇는 그녀는 터미네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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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인자’ 박인비를 위협하는 수잔 페테르센의 별명은 ‘터미네이터’다. 여자 선수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근육과 무뚝뚝한 표정 때문에 붙은 닉네임이다. 페테르센은 비시즌 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느라 집 밖에 잘 나오지 않는다. [골프위크·신화=뉴시스]
LET 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이 열린 중국 하이난에서 만난 페테르센은 “박인비 같은 라이벌이 있어 큰 자극을 받는다. 1위가 될 준비는 이미 끝났다”고 자신만만해했다. [골프위크·신화=뉴시스]

6일 중국 하이난(海南) 미션힐스골프장에서 개막한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 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 여자 골프 세계랭킹 2위 수잔 페테르센(33·노르웨이)은 6언더파 단독 선두로 1라운드를 마친 뒤 곧바로 주니어 클리닉(중국 유소년 선수 지도)으로 향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라운드와 클리닉을 마치니 오후 4시가 넘었다.

 하지만 페테르센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호텔 안 헬스장으로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긴 페테르센은 얼굴이 벌개지도록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한 시간 넘는 훈련을 마친 뒤 페테르센은 “트레이닝은 내 에너지의 원천이자 휴식이다. 트레이닝을 하면서 더 강해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페테르센은 47주째 세계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박인비(26·KB금융그룹)를 위협하는 강력한 도전자다. 박인비(랭킹포인트 10.31점)에 불과 0.85점 뒤진 2위다. 키 1m73㎝에 어깨가 떡 벌어졌고, 탄탄한 근육과 무뚝뚝한 표정까지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이 딱 맞아 떨어진다. 페테르센은 여자 선수 가운데 가장 강력한 샷을 날린다.

 2003년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에 데뷔한 페테르센은 2006년까진 부상을 달고 살았다. 2004년 엘보(팔꿈치 염증)로 수술대에 올랐고, 2005년 등 부상으로 9개 대회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본격 시작한 뒤 페테르센은 누구보다 강해졌다. 2007년 5승을 거두며 상금랭킹 2위에 올랐고, 지난해까지 통산 14승을 쓸어담았다. 과거 LPGA 투어엔 역기를 드는 여자 선수들이 거의 없었지만 페테르센의 성공 이후 웨이트 트레이닝 붐이 일었다.

 이제 웬만한 여자 선수들도 체력훈련을 꽤 많이 하지만 페테르센은 중독 수준이다. 미국 올랜도 집 지하실에 4만 달러(약 4250만원)를 들여 헬스장을 만들었고, 겨울엔 그곳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페테르센은 “골프 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물리치료사나 헬스 트레이너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페테르센은 2012년 미국 ESPN의 ‘보디이슈’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모델로 나섰다. 페테르센의 강한 곡선이 눈길을 확 끌었다.

 터프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 스타일은 아버지 악셀과 어머니 모나 페테르센의 영향을 받았다. 스키 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막내딸을 사내아이처럼 키웠다. 어린 시절 페테르센은 두 오빠들과 어울려 하키와 농구·승마·스키 등 거친 운동을 배웠다. 페테르센은 “아버지는 매우 엄격했다. 한계를 넘어야 한다고 늘 말씀했고, 그게 나에겐 당연한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의 전 캐디 셰인 베이컨은 “페테르센은 짐승처럼 운동한다. 골프는 물론 체력훈련을 할 때도 운동의 강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다”고 전했다.

 다섯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골프장에 갔던 페테르센은 열두 살 때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골프 선수가 됐다. 페테르센은 스키와 승마에도 재능을 보였지만 어머니가 골프를 선택했다. 페테르센은 주니어 시절 다섯 차례 노르웨이 아마추어 챔피언에 올랐고, 1999년 브리티시 여자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1998년과 2000년 월드 아마추어 팀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어 아마추어 무대 정상에 섰다.

 페테르센의 승부욕은 어릴 때부터 강했다. 그는 “골프를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내 꿈은 세계 1위였다. 타이거 우즈와 안니카 소렌스탐 등 남녀 최고 선수의 사진을 내 방에 붙여놨다. ‘최고가 되겠다’는 문구를 다이어리에 썼다”고 했다.

 페테르센은 멘털도 ‘터미네이터’처럼 만들고 싶어한다. 2006년부터 세계적인 멘털 트레이너 피아 닐슨과 린 메리어트의 지도를 받고 있다. 페테르센은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우수한 정도로는 안 된다. 완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땐 클럽을 집어던지는 등 과격한 모습도 보인다. 특히 여자 선수들이 그에게 다가서기 어려워 한다. 어머니 모나는 “투어 생활을 오래하면서도 페테르센은 친구가 많지 않다. 미국에 온 목적을 잘 알기 때문에 골프 외에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는다. 혹독하게 자신을 관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멘털 트레이닝을 통해 강하기만 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있다. 페테르센은 “과거엔 화를 많이 냈다. 그러나 많은 경험을 하면서 조금씩 경기를 즐기는 법을 깨달았다. 필드에선 강해 보일 필요가 있지만 난 원래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투어 관계자들은 날 스마일리(Smiley·웃는 모양)라고 부른다”며 살짝 웃었다.

 그는 아직 한 번도 세계 1위에 오르지 못했다. 5승을 거뒀던 2007년엔 ‘골프 여제’ 로레나 오초아(33·멕시코)에게 막혔고, 오초아 은퇴 이후로는 청야니(25·대만)와 박인비에게 밀려 만년 2인자에 머물렀다. 페테르센은 “지금까지 세계랭킹 1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동기 부여가 된다. 박인비 같은 라이벌이 있어 더 자극을 받는다. 난 1위가 될 준비를 이미 끝냈다”며 자신만만해했다.

 페테르센은 7일 2라운드에서 5타를 줄여 중간합계 11언더파 단독선두를 지켰다. 박인비는 7언더파 공동 8위에 올랐다. J골프가 3·4라운드를 8~9일 오후 2시15분부터 생중계한다.

하이난(중국)=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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