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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 제46화 세관야사(1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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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군정하의 밀수>
미군정 때부터 6·25가 나기 전까지는 밀수 극성기였다.
대규모 조직적인 밀수로 치부한 사람도 많았고, 이때는 밀수범들이 붙잡혀도 적당히 처리되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군정 때 무역은 1946년1월 대외무역규칙이 공포되면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초기는 마카오·향항·상해 등지와 배편이 좋았던 인천에서 무역이 많았는데 인천의 화상 만취동·동순동·광태성 등의 매판자본에 의한 상관무역이 활발했다.
이 무역형태는 변칙적인 것이어서 승감관리의 눈을 피해 야간에 항외에 정박중인 정크단에서 화물을 작은 배에 옮겨싣고 일단 보세창고에 넣었다가 세관 몰래 빼내거나 화물을 바꿔치는 방식이 많았다.
일종의 밀수였다. 화상들은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던 시계·금괴 등을 주로 밀수입하고, 나갈 때는 암시장에서 청표(미 본토 불)로 바꿔갔다. 따라서 중국무역선이 들어오면 청표시세가 올라가고 배가 뜸하면 시세가 떨어졌다.
또 일반상품으로 국내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은 사카린과 담배말이 종이인 라이스·페이퍼였다. 설탕이 귀한 때였으므로 제과점이나 다방에서는 사카린을 많이 썼고 라이스·페이퍼는 가짜 담배를 만드는데 이용했다. 군정 때는 가짜담배가 진짜보다 질이 좋아 『가짜가 진짜를 누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해방이후 6·25전까지는 인천항이 부산항보다 경기가 좋아 보세창고에는 언제나 수10억원의 수입품이 쌓여있었다.
인천의 만취동 보세창고가 가장 컸고, 주인 강 모는 무역도 하고 밀수도 많이 해서 거부가 되었으나 6·25가 일어나 보세창고가 괴뢰군의 손에 들어가거나 털리어 파산하고 일본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물론 대 중국무역은 한국인들도 많이 했다. 미국 유학까지 한 김 모는 군정장관 러치 소장과 친분이 두터워 북지(중국 북부지방)에서 해외재산 반입명목으로 미국선박을 이용, 중고전동기 수백대를 밀수입하여 큰돈을 벌었다.
그는 서울 종로2가에 장안빌딩을 사고 가회동에 큰 저택을 마련하여 군정요인들을 자주 초대하는 등 호사스런 생활을 했으나 6·25전 홍콩에 가서 이북을 상대로 인삼장사를 하다 말썽이 되더니 6·25때 납북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홍 모·정 모 등이 천진·대련방면에서 중고타이어·피아노·선박 등을 들여와 큰돈을 벌었으나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됐다.
군정초기 미국선박에 대해서는 세관원이 손도 못대게 했으므로 미국 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외무역규칙상 밀수범은 군정재판으로 처벌토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경합되는 관세법(구 일본법)적용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다.
세관에서 통고 처분한 것은 관세법에 따른 것이었으나 이 통고처분에 불복한 경우나 타 기관에서 검거한 밀수사건은 대개 군정재판에 회부되었다.
군정재판은 밀수사건의 경우약간의 벌금만 물게 하고 밀수품은 화주에게 돌려주는 것이 판결의 통례였다.
원래 관세법에는 밀수품은 몰수하기로 되어있었으나 군정법령인 대외무역규칙에는 귀금속과 마약·미곡만을 몰수하고 기타는 몰수규정이 없이 막연하게 『군정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게 함』이라고만 되어있었다.
따라서 재판관은 귀걸이 코걸이식 판결을 하기 일쑤였고 밀수범들은 구속이 돼도 벌금만 물으면 곧 석방되는 경우가 많아 밀수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실정이 이렇고 보니 세관에서 아무리 기를 써도 밀수 단속실적이 오를 리 없었다.
군정당시 무역으로 특이한 것은 「남북교역」이었다.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948년5월까지 남한에서는 소비물자릍 보내주는 대신 북한은 전력을 공급해주었는데 두 점령군의 공인하에 민간교역도 활발했다.
북한으로 가는 물품은 면포·전선·약품·기계부속품 등이었고, 남한으로 내려오는 것은 명태·카바이드와 비누 등이었다.
전력과 대상물자의 남북교역은 묵호·포항·해주·원산항에서 이루어졌고 묵호세관과 포항세관에서는 민간교역을 체크했다.
그러나 두 세관은 허가를 받지않은 사무역에 대해서도 약간의 벌금만을 물리고 세금은 받지 않았다.
화신을 비롯하여 몇몇 상사가 남북교역에 참여했으나 화신이 교역물자를 실어 원산항에 보낸 5백t급 화물선 앵도환을 북한측에서 그대로 뺏고 돌려보내지 않은 사건(1948년)이 있은 후부터는 남북교역이 끊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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