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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전쟁 화풀이' 中 해외쇼핑 단속···아모레 주가 15%↓
해외 럭셔리 브랜드 매장 앞에 줄을 선 중국 관광객들.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의 불똥이 한국으로 튀었다. 지난 7월 미ㆍ중 양국이 서로에게 관세 폭탄을 터뜨리기 시작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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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88)|관세야사(35)엄승환
밀수는 진드기 같아 약을 쓰면 수그러지고 안쓰면 성하는 법이다. 1960년 민주당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영일이 없는 내분과「데모」사태등으로 행정력이 모자란 틈을타 밀수는 또 다시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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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87)|관세야사(34)엄승환
1960년11월초 국회국정감사반이 부산세관을 감사하게 되었다. 감사는 세관회의실에서 실시됐고, 국정감사반은 대부분 민주당의원들로 구성됐으며 무소속의원은 한 사람 뿐이었다. 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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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85)|관세야사 엄승환(32)
밀수치고 1956년 11월의「마카리오·장」(중국인) 시계밀수사건 만큼 충격적인 것도 드물 듯 하다. 2억원대의 규모도 규모려니와, 당시 국회의 거물들이 관련돼 정계에 큰 파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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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84)|관세야사 엄승환(31)
보석은 예나 이제나 밀수대상품목에 꼭 끼여들어 1954년에는 미국인이 8만「달러」어치를 밀수입, 구곳된 사건이 일어났다. 1월하순 구정을 이틀 앞두고 광화문네거리 종각옆에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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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82)|관세야사 엄승환(29)
우리나라가 「달러」를 벌어 들이는데 큰 몫을 차지했던 품목으로는 중석이 으뜸이었다. 중석을 수출하고 벌어들인 외화(중석불)와 관련된 비화는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는 싸게 불하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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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81)|관세야사 엄승환
밀수망국론이 나오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1·4후퇴는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서울을 비롯해서 대전 이북지방 사람들 대부분이 부산·마산등지로 피난갔다. 따라서 항도 부산·마산등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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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6) 제46화 세관야사(23)
1950년6윌28일 북괴군 탱크가 서울에 들어오고, 그날 밤 공산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나서부터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던 세관원들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서울세관 총무과장 윤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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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 제46화 세관야사(22)
「6·25」가 터진 다음날 월요일 상오 재무부 장관실에서는 재무부 국장회의가 있었다. 당시 최순주 장관이 마침 부재중이어서 김유택 차관이 회의를 주재했는데 김 차관은 사태가 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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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 제46화 세관야사(21)
우리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세관이 당면한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전방연합국의 상인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1949년 추석전후로 기억된다. 중공군의 중국대륙 석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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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 제46화 세관야사(20)
1950년3월1일 싯가 1천만원짜리 국보급 금부처가 김포공항을 통해 밀반출되기 직전 압수된 사건이 있었다. 이 금부처는 외교문서를 가장한 봉투 속에 넣어 공항검사대를 빠져나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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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 제46화 세관야사(19)
제주를 자유항으로 만들어보려는 구상과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의 재산을 면세로 반입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노력은 4반세기 전에도 있었다. 1950년 재무부 세관국이 주동이 되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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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 제46화 세관야사(18)
1948년 독립정부가 수립되자 과거70여년 동안 외국 여러나라의 제도를 모방하거나 압력을 받아 시행해온 9개 관세관계법령과 관세율대신 신관세법의 제정을 서두르게 됐다. 초대 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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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 제46화 세관야사(17)
1948년8월15일 중앙청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이 거행되고 같은 날자로 군정장관 하지 중장이 미군정폐지를 발표했다. 최초의 정부기구는 11부·4처·66국이었고, 재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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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 제46화 세관야사(16)
마카오 신사가 서울 명동에서 활개치던 군정 때 사회풍조를 비웃는 말로 『들락날락 군정청, 흐지부지 재판소, 먹고 보자 ○○○, 내일오라 서울시』라는 노래(?)가 있었다. 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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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 제46화 세관야사(15)
미군정 때부터 6·25가 나기 전까지는 밀수 극성기였다. 대규모 조직적인 밀수로 치부한 사람도 많았고, 이때는 밀수범들이 붙잡혀도 적당히 처리되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군정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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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제46화 세관야사(14)
필자가 군산세관장으로 있을 때만 해도 세관은 어수룩했었다. 내가 군산세관장으로 부임한 것은 1947년2월1일자였다. 나는 운이 좋게 복직할 수 있었고, 곧 세관장의 보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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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6) 제46화 세관야사(13)
8·15해방으로 일본·중국 등지에서 돌아온 해외동포와 장병 및 공산당에 쫓겨 월남한 동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서울을 비롯한 남한 땅의 도처에는 실업자가 많이 생겼고 식량과 의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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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5) 제46화 세관야사(12)
세관은 원래 관세를 징수하는 것이 주업무이므로 재무국에 예속되는 것이 원칙인데 해방직전에는 일본이 전시체제를 갖추기 위해 운수행정기관인 교통국산하의 부두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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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4) 제46화 세관야사(11)
8·15해방이 되자 부산항은 패전으로 출국하는 일본인들과 일제에 강제징용 당했다가 귀국하는 한국인들로 뒤범벅돼 한때 소란스러웠다. 1945년9월l6일 미군의 부산진주를 전후해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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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3) 제46화 세관야사(9)
하나의 세관에 한국인·일본인·만주인 등 세 나라 사람이 근무하던 대표적인 예가 안동세관이었다. 필자가 안동해관에 들어간 것이 1933년4월. 당시 일본군부는 1931년9월 만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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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 제46화 세관야사(8)
한·일 합병으로 한국과 일본은 같은 국내로 취급되어 밀수문제가 없었으나 압록강·두만강을 사이에 둔 장장 1천3백여km의 한·만 국경의 밀수는 특히 유명했다. 특히 1930년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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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1) 제46화 세관야사(7)
1932년 일본 관동군 중좌가 다액의 보석을 횡령, 운반하다가 한국세관원에 붙들리자 자결한 사건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일정 때 한만국경 만주 안동역에서 두 나라 세관원이 공동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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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1) 제46화 세관야사(7)
1908년1월부터 새로운 관제가 실시돼 해관이 세관으로 개칭됐고 총세무사청이 폐지되는 대신 도지부(탁지부=재무부)의 외국으로 관세국이 생겨 그 장을 관세총장이라 한 것은 앞서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