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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5) 제46화 세관야사(1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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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환원공작>
세관은 원래 관세를 징수하는 것이 주업무이므로 재무국에 예속되는 것이 원칙인데 해방직전에는 일본이 전시체제를 갖추기 위해 운수행정기관인 교통국산하의 부두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해방과 더불어 세관을 본래의 업무에 충실한 기구로 환원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해방직후 예동식씨(일정 때 세관재직·해방후 유한양행 지배인)와 인천의 정문성씨 등이 환원공작을 처음으로 벌였다.
예씨는 영어에 능통하여 군정 때 교통국 해사부장이던 커스턴 소령과 직접 만나 환원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커스턴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여 부득이 방법을 바꾸어 재무국 세관책임자 스미드 대위를 만나 재무국의 세관으로 환원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스미드도 신통한 언질을 주지 않아 환원공작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이때 북한에서 신태억씨(70·인천거주)가 월남했다. 신씨는 함경북도 훈계부두분국장직에 있었던 분이어서 세관 환원의 필요성을 잘 아는 분이었다.
신씨를 중심으로 다시 환원공작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그는 지금도 그때 일이 생생하게 기억된다고 했다.
신씨는 해방직전 함북 상삼봉 부두분국에 재직하다가 훈계분국장으로 승진되어 부임하자마자 해방을 맞았다.
해방 수일 전 신씨는 만주 간도지방에서 철도편으로 북한의 상삼봉에 진주한 소련군에 붙들려 소련군 사령부에 끌려가 청진세관장을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신씨는 당시 사정으로 보아 이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별 할일도 없이 어물어물하다가 1945년10월중순 감시의 눈을 피해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몸이 약해 얼맛동안 인천에서 쉬고있던 신씨를 찾아간 것은 인천부두국의 정문성씨와 이우봉씨였다.
이들은 신씨에게 그 동안의 환원공작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씨는 우선 중앙기구를 장악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교통국 해사부 부두계를 찾아가 보았다.
당시 미 군정당국은 해방후 얼맛동안 각 행정기관에 있던 일인책임자들을 붙들어두었는데 부두계에는 광진·삼도·대진이라는 세 사람이 남아 잔무정리를 하고 있었다.
서로 잘 아는 처지인지라 세 사람중 상석자인 광진이 신씨를 반기면서 『당신이 올 줄 알았소. 여기 십기비품과 서류를 정리해놓았으니 인수하시오』하는 것이었다.
풀이 죽은 일인의 말을 받아 신씨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당신네들이 무조건 항복을 하고 물러나는 마당에 인계인수가 어디 있소. 그대로 놓고 나가면 되지 않소.』
드디어 일인들이 물러가고 신씨는 부두계에 남아있던 한국인 여사환 한 사람을 데리고 그날부터 세관업무를 다시 맡았다. 1946년2월에는 중앙의 부두계가 해관과로 승격되었다. 초대과장에는 김순식씨(작고, 서울상대 교수·숙대학장 역임)가 임명됐다.
신씨는 김 과장을 설득하여 부두국을 재무국산하의 세관으로 환원시키는 노력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했다.
그러나 교통국 해사부장 이동근씨는 교통국장 해밀턴 중령과 짜고 환원계획을 맹렬히 반대했다.
이 부장은 장택상씨의 동서로 원래는 해운업자였으나 장씨의 힘으로 관계에 진출한 분이었다. 신씨는 김 과장을 앞세우고 여러차례 반대파와 함께 연석회의를 열고 환원문제를 토의했다.
김 과장은 강원도 3재중의 한사람으로 소문나있었는데 두뇌가 명석하고 이론이 정연하여 언제나 토의에서 반대파를 압도했다.
그러나 반대파는 세관을 내놓기를 싫어하여 협의는 겉돌기만 했다.
신씨는 김 과장의 양해를 얻어 재무국 세관책임자 스미드 대위를 만나 극비리에 교섭을 다시 벌였다.
스미드는 먼저 예동식·정문성씨로부터 사전교섭이 있었고 또 재무국 고문이던 장기빈씨(작고·장면씨 부친·한말 인천세관 과장)의 사전설득도 있고 해서 세관에 대해 상당한 인식을 하고있었다.
스미드는 환원공작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조금 기다려달라고 했다.
결국 1946년4월 미 군정청 기구가 11부7처로 확대 개편되면서 종래의 국이 부가 되고 부 산하에 국·과가 생겼는데 교통국은 운수부로, 재무국은 재무부로 바뀜과 동시에 교통국 소속 해관과도 세관과로 명칭이 바뀌고 재무부 국고국에 예속케 되었다.
신씨는 스미드로부터 기구개편에 관해 연락을 받고 관계집기비품·서류 등을 남대문 건너편 일화빌딩으로 옮겼다.
이로써 세관은 l943년12월이래 약 3년간 부두국이라는 변칙적인 체계로 운용되다가 관세행정을 전담하는 세관으로 환원케 되었다. 초대 재무부 세관과장은 김순식씨.
이때 군정청 민정장관은 안재홍, 재무부장은 윤호병, 국고국장은 차균찬이었다.
얼마후 세관과는 일화빌딩에서 남대문3가 파출소 옆 구 동경해상화재보험 사옥(현 한은 조사부 자리)으로 옮겨져 「세관중앙본부」라는 간판을 내걸고 독립청사를 쓰게됐다. 당시 지방에는 5개 세관(인천·부산·군산·목포·묵호)과 9개 감시서가 있었고 세관직원은 모두 2백79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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