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375) 제46화 세관야사(2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세관의 피난살이>
「6·25」가 터진 다음날 월요일 상오 재무부 장관실에서는 재무부 국장회의가 있었다.
당시 최순주 장관이 마침 부재중이어서 김유택 차관이 회의를 주재했는데 김 차관은 사태가 유동적이라며 직원들은 동요치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지시했다.
그날 하오가 되자 벌써 북괴의 야크기가 서울상공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정보는 갈팡질팡 종잡을 수 없었다.
재무부 직원들이 교대로 숙직근무를 하게되었고, 장·차관이 밤중에도 퇴근하지 않고 남아있었다.
27일 새벽3시쯤 인천세관 권종근 감정과장으로부터 숙직하던 필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인천은 비교적 평온한데도 직원들이 교대로 숙직근무를 하고있다며 박흥식씨가 떠나는 일본 배에 승선하겠다는데 허가해도 좋으냐고 물었다.
이 보고를 받은 강성태 세관국장은 『사태가 험악하니 우선 승선은 허가하되 배는 앞으로 사태추이를 보아 출항시키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곁들여 필자는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세관감시선을 정비하여 언제라도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27일 날이 밝자 북괴 야크기에서 기총소사를 하는 통에 직원들은 모두 아래층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고 이때부터 주위는 더욱 어수선해졌다.
상오10시쯤 김 차관 주재로 마지막 국장회의가 열렸다.
김 차관은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각자 자유행동을 하라』고 시달하고 직원들에게 월급 2개월분씩을 가불해주도록 조치했다.
이 가불조치는 강 세관국장의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필자는 서기관 때였으므로 3만5천원 정도(서기관봉급 1만7천여원)가 가불됐고 후에 대전에 내려가 2만원을 더 받았기 때문에 5만5천원으로 가족과 함께 3개월의 피난생활을 했다.
당시 물가는 쌀 한 가마에 2만5천원.
김 차관의 지시에 따라 직원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게 됐고 필자도 남산동2가에 있던 집에 가게됐는데 이날 하오5시쯤에는 강 세관국장이 차를 타고 들렀다.
미아리쪽에서 벌써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강 국장은 같이 일하고있던 부하직원들 집을 찾아다니며 『한강을 건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다녔다.
강 국장 자신도 급했을 텐데 이렇게 세심하게 배려를 하여 지금도 고마운 마음 금할 수 없다.
필자는 가족을 데리고 3시간쯤 걸려 한강다리를 건너서 영등포에 이르니 밤11시가 됐다. 지친 가족들과 함께 영등포역 광장에서 주먹밥을 먹고 깜박 잠이 들었는가 싶더니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3시였다. 이때 한강철교가 폭파된 것을 나중에야 들었다. 필자가 수원을 거쳐 대전에 닿은 것은 30일 아침.
재무부가 있다는 대전도청으로 가봤다. 박희현 예산국장과 강 세관국장이 와있었고, 과장급은 몇 사람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세관국은 국장 외에 김창성·이규창씨와 필자 셋이서 자리를 지키게됐다.
대전에서 장관들은 물론 고급공무원들이 부하직원들 몰래 새벽에 도망을 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강 세관국장만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부하직원들을 기다려 2만원씩의 여비와 요원증을 나누어주었다.
요원증이란 흩어져 남하하는 직원들이 부산세관·마산세관 등지에서 보근을 하게 하는 임기응변책의 신분증 같은 것이었다.
7월 중순 정부가 대구로 옮기게 되었는데 강 세관국장은 최순주 장관에게 건의, 부산·마산 등지에 출하되어있던 광석·고철 등의 수출선적 허가사무 때문에 부산으로 떠났고, 세관국 직원들도 며칠 후 부산으로 가게되었다.
세관국은 부산세관 총무과 공매계 방을 얻어 간판을 붙였으나 부산세관장 한보용씨(작고·상공부 전기국장 함남지사 역임)의 냉대가 심하여 다시 세관건너편 철도국건물로 사무실을 옮기게 됐다.
당시 서울·인천쪽에서 많은 세관직원들이 부산으로 피난, 세관국은 이들 직원들을 부산세관 보근으로 명령을 냈지만 부산세관장은 보근명령에도 불구하고 피난직원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마산세관장 김기종씨의 주선으로 진해에 일본식 집 한 채를 빌어 피난간 직원과 가족들을 수용할 수 있었고, 마산세관 감시과장 전응상씨와 진해 감시서장 최규삼씨의 노력으로 해군에서 식량을 보급받아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9·28수복이 되자 강 세관국장은 각 부처 선발대와 함께 10월4일 LST편으로 인천에 상륙했다.
상륙 하루 전 함상에서나마 개천절기념식이 조촐하게 있었는데 당시 기념식은 어느 때보다도 감격스러웠다고 강성태씨는 회고했다. 피난길에 고생도 많았던지라 함상에서 인천항을 바라보며 노진설 심계원장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하고 보니 울고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울에 돌아온 재무부는 중앙청건물이 너무도 파괴되었으므로 국회건너편 동양화재보험회사 사옥에 임시로 들게되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