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0) 제46화 세관야사(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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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세관국 탄생>
1948년8월15일 중앙청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이 거행되고 같은 날자로 군정장관 하지 중장이 미군정폐지를 발표했다. 최초의 정부기구는 11부·4처·66국이었고, 재무부에는 예산·이재·사세·세관·전매 등 5국이 있었다.
재무부의 초대진용은 장관 김도연 박사·차관 장희창·예산국장 박희현·이재국장 김경진·사세국장 인태식·전매국장 윤상은씨였고, 세관국장에는 강성태씨였다.
박희현·인태식·강성태씨는 후에 모두 장관을 지냈다.
정부수립당시 세관기구는 중앙세관국에 관세·감정·감시·조사 등 4과를 두었고, 지방에는 인천·부산·서울·군산·목포·여수·마산·제주·묵호 등 9개 세관외에 김포의 1개 출장소와 17개 감시서로 되어있었다.
군정에서 정부수립단계로 접어들기 직전 초대 세관국장에 강성태씨가 1948년11월 정식 임명되기까지 웃길만한 일화가 남아있다.
성대법과 1회 출신인 강 국장은 군정당시 세관과장이었고 정부수립 후 잠정적으로 세관국장 일을 보던 남궁 박사로부터 업무인계인수를 받았다. 그런데 군정당시 군정청 운수부의 통역으로 있었던 구학남씨(작고)가 초대 세관국장자리를 노렸다.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인 구씨는 남궁 박사를 가리켜 『저 늙은이가 곧 그만두면 내가 세관국장이 된다』고 설치며 『내 말만 잘 들으라』는 모호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미군이 1950년5월까지 철수하는 동안 미군물자의 불하가 많았던 기회를 이용, 구씨는 불하관계사업에 손을 대 돈을 많이 벌어 전남 화순에서 민의원에 출마하여 3, 4대 의원을 지낸 분이다.
초대 세관국장에 기용된 강성태씨(72·현 관세협회 회장·우석대병원 입원중)는 자신이 발령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3년9월 재무부차관에 영전되기까지 약 5년동안 세관국장으로 있었던 강씨는 8·15해방직후 만주에서 귀국했다.
만주에서는 개척단장으로 있었다. 당시 일본의 간계에 넘어간 많은 한국농민들이 만주로 건너가 정착, 개척사업을 벌인 때가 있었다.
강씨는 귀국했지만, 별로 하는 일없이 지내다가 무역협회에 들어가 상무·전무를 거치는 동안 무역협회회장 상산 김도연 박사를 잘 알게 되었다.
현 무역협회 전신인 당시 무역협회는 1946년 군정당시 대일무역규칙이 공포되면서 상무부(현상공부)장 오정수씨 때 발족된 것이다.
상산은 48년8월 정부수립과 동시에 초대 재무부장관으로 가면서 강씨를 불러 『앞으로 많은 인재가 필요할텐데 아는 사람 가운데 유능한 사람을 천거해 달라』고 했다. 이같은 연유로 당시 강원도청 국장으로 있던 인태식씨를 비롯, 몇몇 사람이 천거됐다.
상산은 장관취임 얼마 후 다시 강씨에게 연락, 찾아간 강씨에게 대뜸 『나를 도와서 세관국장을 맡아달라』고 청했다. 이 청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강씨는 장관에게 얼마 전 천거한 몇몇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무슨 뜻인지를 알았던 김 장관은 『그러면 그 사람들 중 몇몇 사람과 함께 들어와서 도와줄 것』을 다시 부탁했다.
인태식씨가 초대 사세국장, 강씨가 초대 세관국장에 기용된 이야기는 대충 이러했다.
처음 재무부에 들어간 강 국장은 군정이래 말썽도 많았던 세관국이었기 때문에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우선 급한 일이 세관간부진의 인사쇄신이었다. 세관장의 전보와 함께 결원중이던 세관국의 과·계장을 충원했다.
강 세관국장이 새로 이끌게된 세관장에는 인천 박암(후에 외무부차관), 목포 오영근, 여수 김기종, 제주 최등학, 묵호 강조철씨가 앉았다.
서울과 마산은 공석인 채였으나 군산은 필자, 부산 장기빈씨는 그대로 유임됐다.
또 세관국은 관세과장에 무역협회 과장 배경도, 조사과장에 성대 법과출신 김동성, 감시과장에 신태억, 항무과장에 성대 법과출신 김영균씨가 임명됐다.
기타 세관국 계장으로는 한상준·박완형·이원직·이규승·김영수·이상택씨가 있었다.
부산세관장 장기빈씨는 아들인 당시 주미대사 장면 박사의 부탁도 있고 해서 얼마간 유임됐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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