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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 제46화 세관야사(19)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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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주 자유항 계획>
제주를 자유항으로 만들어보려는 구상과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의 재산을 면세로 반입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노력은 4반세기 전에도 있었다.
1950년 재무부 세관국이 주동이 되어 제주자유항화를 위한 현지답사를 했다.
당초에는 최정주 재무부장관이 1950년6월18일 김훈 상공부장관, 백두진 외자청장, ECA부단장 로렌씨와 함께 제주도답사를 하게되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제주도는 공산분자들의 소요사건(48년4월3일, 4·3사건)에 이어 군 경비대 반란사건(같은 해 10월2일)등으로 황폐하고 살벌했었다.
정부는 민심도 수습할 겸 제주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려고 했다.
장관들의 현지시찰은 6·25사변으로 무위로 끝났고 겨우 강성태 세관국장을 비롯한 실무진이 제주도를 답사했을 뿐이다.
1950년6월5일 밤10시쯤 강 국장은 세관국 과장이던 필자, 임용연 촉탁(전미군정청 통역), 박종형 계장과 미 고문관 나이트씨를 대동하고 서울역을 떠나 제주행 길에 올랐다.
다음날 새벽3시쯤 일행이 이리역에 이르자 군산세관장 이승정씨가 군산의 명주 4말들이 「향원」 한 통을 기차에 실어주었다.
일행은 6일 아침6시쯤 목포에 도착, 이날 밤9시쯤 l백t급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앞서 밝힌 여러 사건 때문에 제주도는 삭막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7일 아침6시쯤 제주항에 닿은 배 위에서 본 제주도는 한폭의 그림 같았다.
굴뚝에서 솟아나는 연기가 바람결에 쏠리고 돌담사이로 물건을 짊어진 부녀자들이 오고가는 풍경은 아름다왔다.
제주세관장 최등학씨를 비롯해서 기관장들이 많이 나와 일행을 맞아주었다.
세관장의 안내로 허수룩한 일식여관에 여장을 푼 일행은 곧 제주세관에 들렀는데 그곳에는 감시과장 이안해씨와 한림·서귀포·성산포 감시서장도 와있었다.
세관장의 설명인즉 제주도는 식량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을 육지에서 조달하기 때문에 물가가 비싸다는 것이었다.
일행은 삼성혈이며 남원의 광한루 비슷한 제주군청사도 구경했다.
제주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일행은 출장스케줄에 따라 행동하기시작, 세관에서 마련한 낡아빠진 승용차와 지프에 나누어 타고 우선 제주도를 한바퀴 돌았다.
4·3사건 때 희생된 군경전몰 추모묘비가 곳곳에 있었고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농가들의 궁핍은 상상보다 비참하게 보였다.
몇개밖에 안 되는 모슬포·서귀포 등지의 공장은 모두 파괴되어 복구하려면 큰돈이 들것 같이 보였다. 항구를 돌아보았으나 큰배가 닿을 수 없는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제주시내 제일 큰 요릿집에 기관강·유지들을 초대했다. 요릿집이래야 방을 전부 터놓고 보니 20평 남짓한 집이었는데 서울에 출장중이던 도지사를 빼놓고 손님 15, 16명이 붙어앉으니 비좁았다.
초대된 사람중에는 검사장·경찰국장·군수·지방유지 강경옥씨, 언론계대표 고 모씨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우리일행이 제주도자유항 입지조건 조사차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세주나 만난 듯이 기뻐했다.
이리에서부터 싣고 간 명주 향원으로 주연이 벌어지자 초대된 사람들은 『본토에 온 고관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라면서 흐뭇해했다.
이 자리에서는 제주도를 기필코 관세자유화지역으로 만들어줄 것과 제주도개발을 위해 제주도출신 재일교포의 재산을 면세로 반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입지조건과 당시의 항만시설로는 제주도가 자유무역항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이 출장간 일행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특히 제주항은 수심이 얕고 강한 바람에 은폐물이 전혀 없어 방파제를 축조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 수밖에 없었다.
5백t급의 선박이 겨우 정박할 수 있는 항구의 수심은 어느 정도 인공적으로 준설할 수 있다해도 거센 바람은 어쩔수가 없었다. 제주항 답사를 1주일에 끝내고 목포로 돌아온 일행은 출장을 갈 때와는 달리 마음이 무거웠다. 왜냐하면 주민들의 소망과는 달리 제주항자유화는 불가능하다는 답사결과가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물론이고 정부고위층과 경제계가 모두 제주도 경제개발에 관심이 많았고 학계·언론계에서도 제주항 자유화를 열심히 제창했었다.
결국 제주도 답사결과를 정식보고서로 제출하기도전에 6·25사변이 터져 제주항 자유화구상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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