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82)|<제46화>관세야사 엄승환(2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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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나라가 「달러」를 벌어 들이는데 큰 몫을 차지했던 품목으로는 중석이 으뜸이었다. 중석을 수출하고 벌어들인 외화(중석불)와 관련된 비화는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는 싸게 불하받은 「달러」로 양곡을 수입한 후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정치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중석불사건은 너무도 유명하다. 1952년7월중순 어느 목요일 하오 3시쯤이었다.
부산세관 감시과장 윤현표씨(현관세협회 서울지부장)가 세관국(당시 부산세무서자리)에 느닷없이 들어왔다.
영도보세창고에 있는 밀가루가 시중에 횡류되고 있다는 보고를 하러 온 것이다.
이 밀가루는 농림부가 양곡관리법에 의하여 광산노무자에게 배급키로 하고 면세통관된 것으로 일반시중에 유출을 못하도록 했었다.
횡류사실을 보고받은 강성태세관국장은 시중에 유출되어 있는 밀가루를 압류하고는 수입자인 미진상회·신한산업·영동기업등 3개사의 장부를 거둬 들이고 보세창고는 출고를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부산세관의 조사결과 사건의 전모가 차차 드러나자 윤과장은 관련자들을 구속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다시 세관국에 들렀다. 강세관국장이 윤과장으로부터 마지막 조사보고를 듣기 직전 재무부장관실에 불려들어 갔다. 강국장은 1시간이 넘도록 장관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윤과장과 필자는 혹시 장관실에서 부를지도 몰라 장관실 바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몸집이 좋은 청년 한 사람(뒤에 알고보니 국회의원)이 장관실에서 나오다가 윤과장과 마주쳤다.
그 사람은 평소 잘 아는 사인지 윤과장을 보고 『당신, 여기는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그다음 그 사람이 총총히 사라지면서 남긴 말투가 아리송했다. 『당신들 큰일났소. 이제 벼락이 떨어질 것이오.』
강세관국장은 거의 2시간이 넘어서야 장관실에서 나오더니 괴로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나로서는 조사를 더 하라 말라 할 수는 없으나 관계자의 구속만은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아닌가.
밀가루 횡류이면에는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날 윤과장과 필자가 부산세관으로 갔을 때 세관정문앞에는 새로운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국제시장 상인들이 몰려와 『우리야 무슨 죄가 있느냐, 빨리장사를 하도록 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하루를 지나 월요일에 출근했을 때 재무부 총무과장 황모씨가 필자를 불러 하는 말이 또해괴망측 했다.
그는 『당신,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아시오. 당장 밀가루 압류를 해제하지 않으면 큰 코 다치는 줄 아시오』하고 협박해 온 것이다.
1시간쯤 지나니 강세관국장이 장관실에 다녀왔다. 세관과장 박종하씨와 필자(감정과장)가 국장실에 불려가 들은 이야기는『정부의 명령이니 이유는 묻지말고 무조건 수습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국·과장 셋이서 머리를 짠끝에 뒷일을 위해서 이 사건을 관리책임이 있는 농림부에넘겨 양곡관리법에 따라 처리토록 통보키로하고 세관은 손을 떼기로 했다.
이 사건은 부산정치피동전야의 악명 높은 소위 중석불사건인데 1952년11윌6일 서상관 법무부장관이 사건내용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발표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정부는 농사철을 앞두고 비료와 식량을 긴급도입하기 위해 중석불과 정부보유불 합계4백70만 「달러」를 민간인 상사에 불하했다.
국무회의는 이 외화로 비료·양곡을 도입하여 농림부가 지정하는 가격으로 지정된 지역의 눙민과 노무자들에게 배급키로 의결했었었다.
그러나 도입상품을 임의로 시중에 유출해 엄청난 폭리를 븐 것인바 이는 폭리취체령(군정법령제19호)과 양곡관리법위반이므로 미진상사·남선무역·영동기업·신한산업등을 기소했다. 이들에 대해서는 공개재판이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정부가 보유외화를 6천대1의 공정환율(암시세는 1만2천대1)로 불하받아 도입된 비료·밀가루등을 당초 방침과는 달리 시가로 자유판매케 함으로씨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그 이면에는 정치자금이 오갔다고 알려진 것이다.
밀가루의 경우, 부대당 3만5천∼4만원씩 광산노무자에게 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시중에서 최고8만원씩 거래돼도 아무일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세상에는 중석불로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5백억원의 폭리를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 이 사건의 이면에는 이모씨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세관의 후유증이 컸던 것은 물론이었는데 강세관국장은 한민당으로 몰렸고 부산세관 윤현표씨는 여수로 1년반이나 쫓겨갔다. 필자도 마산으로 좌천될 뻔 하다가 강국장의 진력으로그대로 자리를 지키게 됐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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