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비핵화 보상 약속 깨 … 북핵 협상에 악영향 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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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러시아는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주권국가의 국내 문제에 개입했습니다.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지요. 크림반도 사태가 결국 외교적 수순에 따라 해결될 것으로 믿지만, 이 같은 도발은 훗날 러시아에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바실리 마르마조프(52·사진)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가 러시아 측에 건네는 충고다. 5일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대사관에서 만난 그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장악이 한시적인 것으로 추가적인 위기 고조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전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크림반도의 합병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것도 근거가 됐다.

 크림 자치공화국이 주도하는 분리독립 가능성 역시 낮다고 봤다. 크림 자치공화국의 러시아인 비율이 60%가 넘긴 하지만 우크라이나 국내법과 유엔 등 국제사회가 이를 용인할 리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2008년 러시아가 개입한 조지아 사태를 비교하는데, 당시엔 내부적인 독립전쟁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독립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는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크림 주민들도 이를 알고 있어요. 무엇보다 크림반도의 분리독립은 러시아 내 이질적인 민족문제를 자극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에도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마르마조프 대사는 푸틴의 크림반도 점거는 정치·경제적 목적을 위한 ‘전략’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이것이 “문명화된 방식이 전혀 아니다”고 비판했다. 특히 1994년 러시아를 포함해 미국·영국·프랑스·중국 등 5대 핵보유국이 보증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대한 위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으로부터 넘어온 핵미사일 등 세계 3위 수준의 핵시설을 영토의 안전과 통일성, 주권을 보장받는 약속하에 포기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사태가 북한 및 이란의 핵협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게 마르마조프 대사의 진단이다. 만약 국제사회가 러시아의 약속 위반을 용인한다면 북핵 6자회담 등의 신뢰성이 도전받게 될 것이란 얘기다. 마르마조프 대사는 “지금 사태는 유럽의 안보뿐 아니라 비핵화를 전제로 한 국제사회 안정성 전체를 해치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가 사태 해결에 관심을 갖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협상 테이블에 나온다면 과연 무엇이 협상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마르마조프 대사는 “여러 가지가 가능하지만 영토문제는 결코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 놓인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가치를 러시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좋은 이웃이 될 것이냐 적이 될 것이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과 경제 협력을 증진하는 것은 러-우크라이나 관계를 해치지 않을 뿐 아니라 러시아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가 러시아에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강혜란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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