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권태준(서울대 환경대학원·환경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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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근 몇 년간에「환경」이라는 말만큼이나 세계적으로 널리, 그리고 단기간 내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말도 드물다. 「냉전」이니 「경제발전」이니 하는 말들이 한 시대를 획연 했던 것들이라면, 「환경」또는 「환경문제」라는 말도 또 한 시대를 획연 할 듯한 감마저 있다.
어떤 말이나 개념이 이렇게 갑작스러이 유행하게 되면 그 뜻이 다의적이 되거나 불명료해 지는 것이 보통인 듯 하다. 과연 최근 수년간에「환경」이라는 말이 씌어지고 있는 경우를 살펴보면 여러 다른 배경과 직종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사태와 문제들에 관련해서 쓰고있음을 본다.
가령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산업활동이 널리 지구상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여 환경문제를 제기하고, 등산「클럽」의 회원들은 그들이 즐기는 자연경치를 두고, 환경을 운운한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교육자들이 나이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주변의 사회적분위기를 염려하여 「환경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경제학자나 기업주들은 지하의 자원 고갈과정을 환경문제로 파악한다.
이런 사례는 우리가 흔히 듣고 보는 몇 가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외에도 더 많은 경우에 또 다른 사태와 문제들을 환경이라는 개념 또는 이른바 환경문제로 거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환경」이란 개념은 이제 와서는 정녕 잡동사니 주머니 같은 것이 되어버린 감도 없지 않다.
돌이켜 보건대 최근 수년간에 유행하게 된 「환경」에 대한 관심의 발단은 공업 선진국들의 자연환경의 확대에 대한 자생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런 근원적인 발단을 잘 아는 사람들은 환경에 대한 관심은 선진공업 사회에서나 뜻이 있는 것이고, 우리와 같이 이제 겨우 공업화를 시작하려고 하고있는 곳에서는 시기상조이거나 불필요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환경문제에 관한 국제회의에서도 이런 상반된 태도의 대립을 흔히 볼 수 있다.
한나라의 공업화의 필요와 관련해서는「환경」또는 환경문제에의 지나친 관심에 대해서 신중론이 제법 널리 수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환경」이라는 개념 또는 말의 일반적인 유행은 점점 널리 퍼져 나가고 있음은 웬일일까?
그 발단은 무엇이었든 간에 유행을 하는 도중에 좀더 폭넓은 의미를 담게되어서인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다른 경우에 관련해서 이 말을 적절한 것이라고 쓰고 있음을 보아서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하필 이 말이 폭 넓은 뜻을 함축하여 널리 쓰이게 된 데에는 무엇인가 시대적 적실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는 바는 세계 속의 우리 또는 한 지성사회 안에 나라는 개체는 그 주변 환경과의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태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한 개체가 그 환경을 「정복」해서 생존해 갈 수 있는 여지는 제한되어 있다는 인식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지구상의 만물들 중에 인간만이 유독 오랫동안「환경」을 정복해서 조작하게 마련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의 기술로써 교통과 통신, 그리고 교역 등을 넓혀 온 끝에 이제 스스로의 「환경의 굴레」를 개체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된 것이다. 한나라의 국제정치환경이 그렇고, 개인의 사회첩경이 그렇고 한 기업의 경제 환경이 그렇게 되었다. 이제 시대는 바야흐로 개체와 환경이 상호 적응해야 하는 때가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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