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프로10걸」1위 조치훈 6단 자전적 수기|본지독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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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1년 봄 4단에 나는 동경 한국중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제대로 나가지도 못했고 공부를 못했는데도 표창장이란 걸 받고 보니 좀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바둑으로 국위선양을 했다지만 내 자신은 아직 바둑이 약하고 국위선양을 한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곧 고등학교에도 진학했는데 학교를 빼먹는 것은 더욱 잦아졌다. 이때부터 나는 학교수업 외에 내자신의 교양을 높이는 무슨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승단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되어갔다. 70년과 71년에는 승단 대회 2부에서 연속 우승을 거두었고 그래서 71년도 기도상의 신인상도 수상했다. 3단부터 5단이 될 때까지 승단 대회에서는 한판도 지지 않았다. 73년 6단이 될 때까지의 승단 전적은 34전31승2무1패였다.
이렇게 내 자신이 생각해도 좋은 성적을 냈지만 문하생 때부터「라이벌」인 「고바야시」 는 항상 나보다 앞서 있었다.
그는 나보다 꼭 1년 먼저 입단해서 내가 초단이 됐을 때는 2단이 되어 있었고 2단이 되자 그는 3단이었다. 내가 바짝 쫓아 5단 때 잠깐 같은 단으로 있었지만 그는 금방 6단이 돼 버렸다. 다시 추격해서 같은 6단이 됐지만 그는 작년에 7단이 되었고 나는 금년 말까지 7단이 될까 말까다.
「고바야시」는 나이는 나보다 네살 위지만 바둑을 둔 경력은 마찬가지다. 내가 5세 때부터고, 그는 9세 때부터 배웠으니까. 같이 6l년부터 출발했지만 그는 철이 일찍 들어 나를 앞서 버렸다. 내가 앞섰던 것은「고바야시」가 입문할 무렵 잠깐 뿐이었다. 그러니까 철들기 전 내가 도장에서 장난감 권총을 차고 서부극놀이나 하는 동안 그는 나를 꺾으려고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었다.
내가 「고바야시」를 의식하고 그를「라이벌」로 생각한 것은 철이 좀 나서부터였다. 아니 바로「고바야시」를 의식하고 철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이 때부터 내가 그 동안 받아오던 「기다니」선생의 총애를 그에게 빼앗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바야시」는 그전부터 다른 사람에게는 다 져도 나한테만 이기면 된다고 공공연히 말했었다. 우리들은 이 때부터 1백번 기를 시작했는데 도장을 나올 때까지 60몇 국을 두었던 것 같다.
공식대국에서 그를 만난 것은 지금까지 11번인가 되는데 내가 4승7패로 떨어져있다. 73년 이전까지는 1승5패로 더욱 좋지 않았다. 72년에 나는 신예「토너먼트」와 수상배 쟁탈전에서 준우승을 했는데 모두 결승에서 「고바야시」한데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후 73년 내가 신예「토너먼트」에서 처음 우승을 했을 때는「고바야시」를 만나지 못했고, 작년 신예「토너먼트」의 결승에서 그를 만나 통쾌하게 설욕, 2년 연속 우승을 거두었었다.
나는 아무에게나 어떤 판이든 바둑을 지면 기분 나빠하는 성질이지만 특히 「고바야시」에게 지는 날이면 좌절감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반면에 내가 이기면 『한방 먹였다』싶은 기분이 든다. 아마 이런 게 정말 「라이벌」의식인지 모르겠다.
일본바둑계에는 임해봉이나「이시다」 「사까다」그리고 「가또」 「다께미야」같은 강자들이 많지만 나는 「고바야시」가 가장 나에게 강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프로」10걸 전에서 내가 「가또」를 3연승으로 물리쳐「타이틀」을 얻었지만 만약 준결승에서 「가또」 가 「고바야시」에게 이겨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고바야시」와 결승에서 맞붙었으면 3연승은 물론이고 「타이틀」을 땄을까도 솔직히 자신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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