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라 「따이한」서 살고싶어요|상처 씻고 「제2의 삶」설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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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망국한의 설움을 간직한 채 「사이공」을 탈출, 한국에 온 월남난민들은 조국과 동포, 친척과 친구를 한꺼번에 잃은 슬픔과 허전함을 달래기도 전에 「제2의 삶」을 설계하느라 새로운 고민과 한숨으로 수용소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인정 많은「따이한」에서 살겠어요. 여건만 허락된다면 회사에 취직, 중단된 동생의 학업을 뒷바라지할 결심이에요』-.
「사이공」대학 재학 중 전황의 악화로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간신히 빠져 나와 LST815함에서 재회한 재월 한국인 2세 조옥숙씨(25·사이공대 사범대학4년), 정숙양(21·사이공대 사범대학3년)과 남용군(19·사이공대 전기공학과1년) 등 3남매는 16일 면회 온 고모 조희계(55)씨를 만나 미래를 이렇게 설계했다.
이들은 지난 57년 「캄보디아」에서 비명에 별세한 한국인 아버지 조희덕씨(사망당시 38세)와 월남인 어머니「마이·티·비히」씨(51)와의 사이에 난 2남2녀 중 3남매.
항복직전까지「사이공」시「잉」로 62가81에서 여유 있게 살다 피난물결 속에서 엉겁결에 헤어져 어머니와 동생 만용군(23)·옥숙씨의 남편 윤성호씨(30·「사이공」미 회사 근무)의 행방은 알 도리가 없게됐다는 것이다.
『「사이공」에 남아있는 어머니가 가여워요. 한국인의 처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고초를 겪을 거예요.』옥숙씨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학창생활 때 틈틈이 배워둔 타자실력이 두드러지다는 옥숙·정숙 두 자매는 둘 다 163cm 가량의 키에 갸름한 얼굴의 미인형.
수용소생활이 끝나는 대로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의 고모 조희계씨 집에서 잠시 머무른 다음 일 자리를 구해보겠다고 했다.
『못다 마친 대학생활을 계속하고 싶어요. 허나 돈이 있는 걸로 우선 동생 남용이를 복학시켜 유능한「엔지니어」로 키운다면 다행이겠어요.』 두 자매의 새로운 삶의 의욕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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