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암흑 속의 23년」 참회의 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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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3년 봄부터 4년 동안 나는 개편된 육운총국(교통성을 철도성과 이 국으로 다시 분리)의 종합계획부장을 지냈다. 운수관계 계획실무를 본지도 어언 12년여-.
자동차는 모자라고 화물은 쌓여 나가는데 당의 지시는 서릿발같아 생각하면 수송지옥에서 어거지 춤을 춘 12년이었다. 「트럭」마다 「트레일러」를 달고 다니게 한 연결차 견인 「깜빠니아」를 벌여보기도 했고(57년께부터) 일부 시에선 시내의 전 「트럭」을 한데 모아 운영하는 「모터· 풀」제를 해보기도 했다. 「풀」제는 수송 난에 견디다 못한 김일성이 진남포시를 골라 이른바 수송집중지도를 해보고 대책이라고 해서 내놓은 것. 견인대열을 한창 높일 때는 1대가 「트레일러」를 3개까지 끌고 다니게 했다.
그러나 견인차 끌기 운동은 「트럭·엔진」만 쉬 망가뜨리는 임시변통이고 「모터·풀」제도 수송체제를 오히려 더 복잡하게 할뿐이어서 2∼3년씩 해보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도로국 발족초기에 3천∼4천대가 되던 「트럭」이 64∼65년에 5천∼6천대로 늘어났어도 수송 난은 여전했다. 단적인 예로 김장철이 되면 육운국 보유 「트럭」은 물론 각 기관의「트럭」까지 충 동원해야 김장감을 겨우 나를 수 있을 정도였다.
자연 모든 산업분야가 이 수송 난에 걸려 생산자체가 제대로 안되기까지 해 나중에는 부수상이 직접 전화를 걸고 『이걸 실어라』 『저걸 실어라』고 아우성을 치기까지 했다.
게다가 위의 지시는 「트럭」의 실동율을 무조건 85%이상으로 높이라는 것. 그러고는 운전사들의 노임마저 t·km 도급제(단위=1t을 싣고 1km를 달리는 것)로 해 이 실동율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차가 고장이 나도 운전사들의 월급이 줄어들 판이니 그저 녹아 나는게 운전사들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북의 사회라 해도 「트럭」자체가 모자라고 부속마저 달리는데 명령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닌 것.
실동율을 심하게 다그치면 고장 운전사들은 세워 둔 남의 차바퀴를 몰래 빼 끼우고 한탕을 뛰고는 움직인 것으로 보고하는 것이었고 화물 수송량을 높이기 위한 도급노임제도 운전사와 화주들이 짜고 허위 작업증을 끊어 내는 등 부작용을 빚기만 했다.
허위 작업증은 예를 들어 10탕을 실어 냈는데 12∼13탕을 실어 낸 것처럼 화주가 수송실적을 불려서 떼 주는 것. 매수이긴 하지만 운전사는 일한 이상으로 노임을 타게 돼 좋고 화주는 수송 난을 안타고 남 먼저 화물을 실어 내서 좋고 결국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 물론 걸리면 운전사의 다음달 노임을 까는 것이었지만 화주들이 상전격인 운전사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는 일이라 여간해서 들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엉터리 수송보고를 통계라고 모아 선전하는 관계 상부만이 바보인 셈.
운전사와 화주간의 뒷거래는 이뿐만 아니라 차떼기라는 것도 있다. 우선적으로 물건을 실어 주는 대신 운전사 몫으로 한차를 떼 받는 것. 분탄수송 등에 흔해 10차를 실어주면 1차는 운전사 집으로 가는 것이다. <계속>

<김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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