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 곤경속 우리교포 피란 도와|한국동란 때도 3개 사단 파견을 제의|열화 같은 성격…웃거나 화내는 일 없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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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홍일씨가 장 총통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중국에서 북벌 혁명군에 가담한데이어 38년 제3차 장사회담때 제9집단 참모처장으로 있을 때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청년군 조직문제로「아이디어」를 낸 것이 그의 마음에 들어 장 총통은 김씨를 비행기로 중경에 데려가 이 문제를 상의한일 까지 있었다.
장 총통은 강경하고 불같은 성격이면서 인내성 있고 인정 있는 혁명가라고 김씨는 회상했다, 특히 우리 나라와는 37년 7월 중·일 전쟁에서 열세에 몰려 후퇴를 할 때 우리교포를 중경까지 안전하게 피난시켜 줬고 임정에 독립운동자금을, 그리고 공립학교·중앙정치학교·중앙대학동에 학비면제로 무료입학시기는 등 깊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가 43년「카이로」3상 회담에서 한국독립을 강력히 주장했던 이면에는 한국을 이해했기 때문이며 그만큼 관심 밖에서 한국을 보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해방직후 임정요인들의 환국에 자기네 비행기로 서울까지 수송케 하는 친절도 베푼 장 총통이었다.'
그는 항상 한국이 강력한 반공국가로 성립되길 희망했다.
장 총통은 한국전쟁당시도 3개 사단을 파견하려 했으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중국 군을 받아 싸우게 하면 중공군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길을 트이게 하는 결과가 올 것으로 판단, 거절했었다.
장 총통은 웃거나 성을 내는 일이 없다.
김씨가 6·25사변 직후 주중대사로 있을 때 중공의 금문도·마조도에 대한 포격이 가열해지고 대만 공격설이 파다했을 때 갑자기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긴급히 귀국소환명령이 내려졌다. 그때 이 대통령은『지금 민심이 중공에서 떨어져 가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이틈을 타 중국대륙을 반격토록 장 총통에게 권고해 보게. 그러면 나도 여기서 북진, 모택동 일파를 구축하는데 호응하겠다』고 꼭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김씨의 권고를 받은 장 총통은『감사하나 내게는 힘이 부족하오』라고 대답했다는 것.
끝내 본토 회복의 소망을 다하지 못하고 서거한 노정치가의 모습이 생생하다고 김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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