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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 없은 것들이 이루는 포물선|황경자 <서울대 강사·불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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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외국에 있을 때 혼자 기거하던 기숙사방이거나 귀국 후 결혼하여 가족과 함께 지내는 안방이거나 간에 내가 생활하고 있는 방안은 늘 쓸데없이 보이는 (?)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여행지에서 사온 자질구레한 기념품이라든가 헝겊으로 만든 잘생기고 못생긴 인형, 동물 등 말하자면 생활의 실질적인 소용에는 닿지 않는 물건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정말 쓸데없는 물건들일까? 이들은 나에게 꿈과 자유를 주며 무한한 세계로 인도해준다. 판에 박은 듯한 폐쇄된 일상 생활의 틀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로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에 이르는 직선의 위에 이러한 부질 없은 것들이 이루어 주는 포물선이 인간이기에 필요한 것 같다.
어느 날 텔리비젼에서 흘깃 본 영화 장면에 한 여인이 돈이 생겨 좋아하며 돈을 펴들고 덩실춤이라도 출 것 같은 걸음걸이로 콧노래를 부르며 상점에 전화를 걸어 전에 본 모자를 예약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소침해 있던 여인이 이 모자를 살 수 있게 되자 온몸에 생기가 넘쳐흐르는 것이다.
이것을 여자의 쓸데없는 사치심이나 허영심의 발로라고 부정적인 면에서 볼 수도 있겠으나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이 물건이 그 여인에게 불어 넣어준 기쁨과 자유는 그에게는 절대의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현실에선 이러한 부질 없은 것들이 주는 기쁨이 자칫 외면 당하는 수가 많다. 하나의 실리적인 목표를 향해 제도화되고 규격화되어가고 있은 과정에서 이러한 작은 쓸데없는 것들이나 관상들은 희생 당해 버리는 것이다. 종종 접하는 실례가 하나 떠오른다. 편지 봉투의 규격화가 그것이다. 우편번호 기입이나 수신인·발산인 기입 장소를 친절하게도 명시하여 준 것은 우편사무의 능률화를 기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봉투의 크기까지도 구태여 제약을 가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물론 편지야 편지지속에 적혀있는 내용이 중요하지 그 편지지 자체나 봉투의 크기나 모양은 「쓸데없는 거」에 속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규격화해 버리는 것이 더 간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편지 내용이라는 것도 사무적인 편지가 아닌 다음에야 편지지에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 보내는 사람의 의사나 감정이 충분히 전달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글자화된 특정한 내용 위에 발신인이 보내고 싶은 온갖 환상들이 있다.
어찌 이 편지 봉투 문제뿐이랴.
현실의 한 구석에 이런 개인의 환상과 자유가 허용되는 여백이 항상 남아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가치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계제인 것 같다. 프랑스의 작가로 주로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노래했던 「장·지오노」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일 『젊음은 쓸데없는 것에 대한 정열』이라고 『젊음』대신 『인간』이란 말을 써도 무방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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