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탈한 성품에 통큰 「협상의 명수」 「10·2항명 파동」으로 한때 곤경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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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성곤씨는 그의 영어이름 첫자를 만 「SK」란 애칭으로 흔히 불렸다. 그는 60년대 우리정계의 거물 정치인으로서, 또는 동양통신사장·성곡언론문화재단 및 사학재단의 설립자로서, 쌍룡그룹총수로서 정계·재계·언론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큰 몫을 해냈다.
특히 60년대 후반 공화당재정위원장을 맡으면서 그는 백남억·길재호·김진만씨 등과 함께 이른바 4인 체제를 형성, 상당기간 정·재계의 강자로 활약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스케일」이 크고 소탈한 성격이라고 말한다. 흥정을 해도 큰 흥정을 하고 따라서 정치협상 자리에 그가 들어서면 여·야간에 웬만한 일은 다 해결된다는 말을 들었다. 여당에 속해있었지만 많은 야당사람들과 가까왔던 정치인이었다.
69년 「3선개헌」의 주도역 가운데 한사람이었지만 개헌과 함께 이후락 청와대비서실정·김형욱 정보부장의 사퇴를 강력하게 들고 나와 뜻을 관철하기도 했다.
모교인 고려대의 후배들에게 『국회 의원은 백수건달이 하는 것』이라고 한 그의 말은 정계에 두고두고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다.
3선개헌 때도 『한번 더 한들 어떠나? 잘 살게 해준다는데…』라고 말할 정도로 투박하고 두루몽수리형 발언을 많이 하지만 설득력은 강했다.
4, 6, 7, 8대 4선 의원뿐 아니라 그는 대한유도회장·IPI(국제신문인협회)위원·동양통신사장·전연합신문사장·국민대학재단 이사장 등 많은 공직을 맡았었다.
그의 유도 실력은 학창 시절부터 이름난 것으로 「달성강사」의 실력이 유도회장을 맡도록까지 했다.
정치인으로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 71년 8대 국회에서 그는 그러나 최악의 고비에 몰렸다. 이른바 여당권의 4인 체제와 반4인체제간의 알력의 과정에서 그는 원내세력을 동원,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이른바 「10·2항명파동」을 겪은 것.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길재호씨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해 의원직을 버리고 얼마간 미국에 가있었으며 이기간이 그의 공직 생활 중 최악의 시기였다. 10월유신 후 귀국, 대한상의회장을 맡아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그후 경계와는 일체 손을 끊고 지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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