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그 입지의 현장을 가다|반공포로출신 재인 실업인 지기철씨(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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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뉴델리=김동수 특파원】이런 고생 속에서 남미 정착을 꿈꾸고 수용소 급식으로 참아 가며「유엔」서 지급하는 50「루피」를 아껴 모으는 동료도 있었다. 곁에서 그 악착스러움을 느끼기조차 민망스러울 지경이다.
남미 어느 나라도 선뜻 받아 주겠다는 곳이 없어 거의 1년 동안 기다림 속에서 지치다 보니 괜히 배를 탔다는 생각이 모두를 지배한다.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이 속출한다. 55년 5월에는 한국이나 미 주로 보내 달라고「유엔」에 호소문을 보냈다. 인도 정부의 정책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던 한국 정부도 그렇지만 인도 정부의 한국에 대한 소극적 정책으로 성명서가 오간다는 소식만 들렸을 뿐 도무지 손닿을 길이 없다.

<10여명은 멋모르고 북한 행>
그러다 보니 북으로라도 가겠다는 동료가 10여명 나온다. 여러 사람이 번갈아 가며 설득해도 한번 가겠다고 작정하고 나니 마음이 더 급해지는 모양이다. 아무리 북에서 고생하더라도 인도 생활보다야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몇 사람은 마음을 들려 북한 행을 포기했지만 10명이 끝까지 우겨 인도 정부를 통해 교섭하여 북으로 떠나고 말았다.
인도 정부로서도 얼마 지나고 나니 귀찮아져 빨리 내보내고 싶은 판이라 수월히 주선해 주었다.
이들이 떠날 때 북한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동료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가거든 상황을 알려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실상을 알리지 못할 형편이면 살아 있다는 소식이라도 알 수 있도록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연락해 주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54년 가을 그들은 떠났다.
그러나 이들이 떠난 뒤 기대했던 소식은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오지 않았다. 남은 동료들은 떠나간 이들이 기대했던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지씨는 비록 조국을 등진 포로들이긴 했지만 한국 정부가 외교성명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도와 더욱 적극적으로 접촉, 설득할 아량만 있었던 들 그런 희생은 없었을 거라고 아쉬워한다.
2년 뒤인 56년 2월「브라질」에서 인수의사를 밝혀 57명의 동료들이 「브라질」로 뿔뿔이 흩어져 간다. 57년이 되니 다섯 사람 마저 「아르헨티나」로 가고 네 사람만 남게 됐다. 지씨 역시 남미로 갈 생각이었으나 조건이 맞지 않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장교출신이라는 체통에 얽매다 보니 좀처럼 마땅한 기회가 나서지 않는다.
별의별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음이 답답한 가운데 그 동안 있었던 성당생각이 난다. 56년부터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관심을 가졌던지 주구와 대주교가 각별한 사랑을 베풀어준다.
수용소 막사를 뛰쳐나와 무슨 일이라도 할 수는 있었으나 남미로 떠날 생각 때문에 아무 것도 하기가 싫다. 그렇다고 한달 50「루피」씩의 돈만 가지고 살아가자니 앞길이 막막하다. 남미의 조건이 맞지 않을 바에야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뾰쪽한 도리가 없다.
그래도 폭 양의 계절이 가면 영어와 「스페인」어 단어장을 들고 수용소 바로 앞의 전사자 기념문인 「인디아·게이트」를 오르락내리락하며 틈틈이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57년 11월이었던가, 불현듯 모든 게 귀찮아진다. 지칠 대로 지쳐 더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너진 참이다.

<지칠 대로 지쳐 자살도 생각>
온갖 것을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칼을 품고 병영 앞의「인디아·게이트」주위를 헤맸다. 무슨 생각에선지 단어장을 계속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지난날이 섬광처럼 엇갈린다.
『어쩌지… 더 살아서 무엇 할래… 지금 할까…』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더듬는다.
손끝에 단단한 감촉이 닿는 순간 섬 뜩『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지기철이 살아날 길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주 전장에서 사지로 뛰어들 때 멈칫하는 부하들에게 이르던 말이다. 『하나님에게 죄 안 짓고 남에게 악한 일 한적 없는데 내게 죄 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때린다. 몇 시간이나 헤맸는지 막사에 돌아와 누운 지 서너 시간도 못돼 날이 밝았다.
고생은 여전했지만 그 뒤 틈만 있으면 성당에 나가 의욕을 다시 찾게 된데 대해 무한한 감사기도를 드렸다. 57년부터 국제개발회의와 적십자회의 등에 한국에서 공식대표단이 오가면서 동포를 만나게 되니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더욱 굳어진다. 남미로 가야겠다던 생각도 희미해진다. 함께「뉴델리」에 눌러앉은 동료중 인도 공보성에 사진사로 취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도 여인과 결혼하여 정착하려는 사람을 보니 자신도 마음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몇은 현지서 결혼, 정착>
그러나 인도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대표단으로 오는 한국인이 있으면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갈 방편 좀 마련해 달라고 떼쓰다시피 조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과 인도간에 외교가 틔지 않아 그도 어려운 형편이다. 동료 모두가 그랬지만 지씨는 이때까지 무국적자 신세였던 것이다.
59년 지씨는 뜻밖에도 반가운 인물을 만난다. 판문점의 인도 군 관리수용소에 있을 때 얼굴을 익힌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였던 김영주씨(현「캐나다」대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정부 대표단으로 왔던 김씨는 지씨의 이야기를 듣고는 언젠가는 귀국할 방도를 마련하겠으니 「유엔」신세는 그 만지고 그 동안 생업을 마련해 보라고 일러준다. 한국과 인도의 외교관계가 틜 날이 있을 테니 그때까지 자립할 바탕이라도 마련하는 셈치고 양계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지씨는 별 구체적인 방안도 없이 부랴부랴 양계에 관한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갑자기 결정한 일이긴 하지만 열의를 갖고 몇 주일 책과 씨름한 다음 인도 관청에서 관리하는 양계장을 찾아갔다. 자신의 처리문제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 친분이 생긴 외무성 아주 과장의 소개였다. 양계장에서 1주일간 방법을 익혔다. 의욕에 부풀어 양계장 꾸밀 생각을 하다 보니 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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