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스웨덴의 전화기「디자이너」박근홍씨(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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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결혼한 다음해인 1959년 봄 박근홍씨는 27세라는 나이를 잊고「스톡홀름」공업전문학교(4년제)에 입학했다. 이미 의사가 되겠다던 꿈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전문직을 딸 결심을 했던 것이다. 전문직으로 있는「L·M·에릭슨」에선 그가 이 학교만 졸업하면 정식「엔지니어」로서 뻗어 나갈 길을 약속해 주었다. 「스웨덴」에서는 흔히 대학교육은 부모들의 도움 없이 학생들 자신이 해결하고 있다. 정부로부터 생활비와 책값 등 교육비를 빌려쓰고 졸업 후 15년 안에 갚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스웨덴 의 대학생들은 4년간의 공부를 마치는데 문교부로부터 약 1만「달러」정도의 빚을 진다. 그러나 박씨의 경우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고 적어도「남들보다는 몇 배의 노력을 할 결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 문교부의 빚을 적게 쓰고 공부할 생각을 굳혔다.

<노력한 만큼 보람있어 정착>
『아내가 약국에 나가고 나도「아르바이트」를 하면 빚을 적게 쓰고 될 것 같았어요. 박씨는 주말이면 병원에 나가 밤일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부산 야전병원시절 익혔던 일인만큼 그는「스톡홀름」의 불구아동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밤 시중을 드는 일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3개월의 여름방학동안「에릭슨」회사에 공원으로 나가면서 풀 깎기나 정원사의 일을 했다.
부인 박 여사도 처음 1년간은 부산시절의 경험대로 약국에 나가 일을 했으나 첫아기 광문군이 태어나고서부터는 삯바느질로 수입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상점에서 주문 받아 수놓는 일을 했는데 아주 전문가가 돼 버렸어요.』 박 여사는 하루 3, 4시간씩 수놓는 일을 하면서『돈버는 일을 하려면 우선 그 일에 재미를 붙이는 것이 상책이라는 철학을 터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부부가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했어도 박씨는 4년간을 마치는데는 문교부에 2천「달러」의 빚을 지고「그 몇 배의 도움」을 할머니로부터 받아야 했다.
세계에서 첫손에 꼽힐 만큼의 철저한 사회복지국가「스웨덴」에서는 그만큼 한 개인이 전문직을 따기 위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어렵고 큰 부담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박씨는 그 어려운 전문직을 딴다는 목적이 이곳 사회에서 결코 두드러진 인물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닌 오히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시민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동양인이 모든 것이 다른 사회에, 더우기「스웨덴」같은 오랫동안 조상들이 애써 가꾸어 놓은 자리잡힌 곳에 뛰어들어 산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특히 그들이 힘들게 가꾸어 온 열매를 그냥 따먹겠다는 식의 생각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나대로 무척 노력을 한 셈이지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에릭슨」회사에 취직했던 박씨는 지금까지 12년간 평탄하게 월급쟁이로서 지내 오면서 이 복지선진국가에서 한 한국인으로서의 생활이 경제적인 면을 훨씬 뛰어 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 자신 처음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얻었을 때 이 사회가「노력한 만큼의 보답을 받아 살 수 있다는 점」하나 만으로 그는 여기에 정착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두 아기를 두고「알름크비스트」할머니와 따뜻한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그는『비록 외국인이라는 어려움을 지니고 있지만 이곳에서 잘 살 수 있다』는 자신을 가졌다고 한다.

<한국 인식부족으로 고용>
그러나「한국인」이라는 문제는 이들 부부가 스웨덴생활을 20년 가까이 해 오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늘 의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도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남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말한다.
어디 남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큰소리를 삼가고 집안 냄새를 빼는데 남달리 신경을 쓴다든지, 또는 뛰어나게 옷을 입지 않는다는 등의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직장의 일에 이르기까지「한국사람이라서 저렇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노력이 그들에겐 너무나 큰 정신적인 부담이라고 했다.
박씨는 몇 년 전 직장에서 연구실장으로의 승진도 사양했다. 외국인으로서 아랫사람을 부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아와 전쟁으로만 알려진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더욱 힘든 일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에 대한 신문기사가 실린 날은 아침에 출근하기가 괴롭습니다.』 특히 요근래 한국고아들의 입양 문제가「스웨덴」에서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어 박씨 부부는『얼굴을 들 수 없다』고 말한다.
『너희 나라는 전쟁이 끝난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고아가 있느냐고 물어오지요. 「한국은 언제나 남들에게 기대어 사는 나라」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박 여사는「텔리비젼」에서 한국고아를 입양해 오는 장면을 보이면서 기자가『얼마를 들여 데려오느냐』그 양부모에게「마이크」를 들이대던 일을 회상하면서『왜 한국에서는 무책임하게 아기를 만들어 외국에 입양 보내도록 만들어야 하는지 안타깝다』고 했다.
이러한 어려움 위에 박씨 부부는 자녀교육에도 곤란을 겪는다고 말한다. 『너는 한국사람이니까 남달리 조심해야 된다』는 부모의 말을 자녀들은 전혀 이해를 못한다는 것이다.

<올핸 새집 마련하는 게 소망>
『아이들은 외모만 동양인이지 생각은 이곳 아이들과 같으니 어떤 때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자녀들은 물론 이곳사회에 적응시켜야 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동양에서 자란 부모들과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20년 동안「스웨덴」에 와서 우리들이·한국인이라는 탈을 절대 벗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박 여사는 특히 음식에서 지금껏 밥과 김치를 빼지 않고 담가 왔다. 동양인이 드문 북구에선 그동안 쌀과 무우·배추정도를 조금씩 구할 수 있었으나 요 근래 와선 간장 같은 것도 살수 있는 자그마한 식품점이「스톡홀름」에 한두 군데 생겨났다. 박 여사는 콩을 사다 집에서 두부도 만들고 콩나물도 길러 먹고 있다.
1965년 유재흥 대사가 부임해 왔을 때 처음으로 산에서 고사리를 발견하여 이곳 교포들 사이에서 커다란 화제가 됐었다. 원래 고사리는 이곳에서 독초로 알려졌으나 한국사람들이 이제는 봄에 야유회에 나가 단체로 뜯어다 저장한다는 것이다.
『호숫가에 쑥이 나 있는데 아침에 몰래 가서 캐다가 국을 끊여 먹습니다.』 박 여사는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토끼에 먹인다』고 말하면서 쑥과 씀바귀를 캐 왔다고 했다.
64년에 시민권을 얻은 박씨 가족은「스웨덴」에 온지 12년만인 70년에 처음으로「아파트」를 샀는데 올해 새로 집을 짓는 것이『이민 온 이래 최대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스톡홀름=윤호미 특파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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