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기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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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요사이 젊은이들은 흔히 기분에 산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현대인 모두가 기분에 사는 편이다. 요사이 우리는 주위에서 이 기분 때문에 싸우는 것에서부터 살인까지 한 엄청난 예를 보고 있으며 더우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도 아닌 것을 어느 단체의 극력「데모」등 거의 기분에 가까운 감정 때문에 폭발한 사회 불만 상을 많이 보고 있다. 사과문 하나, 그것도 사과문 같지도 아니한 해명서하나를 받기 위하여 나라가 떠들썩할 만큼 그런 혼란상이 있어야 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더 한심한 것은 정권을 겨냥하는 정치인들이 기분에 사로잡힌 언동을 하고 국책을 담당한 위정자들이 거의 기분적인 정책이나 반응을 하는 것을 보게되면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백년대계로 세워질 문교정책이 꼭 젊은이의 기분 같이 무상하게 변하고 국가의 연료정책이 유류에서 연탄 또 유류로 환원되는 등의 급격한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나 어느 일간지의 광고해약 탄압이 어느 층의 기분을 거스른 반발이라느니, 또 긴급조치 같은 엄청난 조치도 전후를 보면 기분으로 그렇지 않았나 느낄 정도니 말이다.
국어 사전에는 이「기분」의 어휘를 「감각에 따라 생기는 단순하고 막연한 쾌 불 쾌의 느낌」이라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 단순하고도 막연한 감정에 따라 산다거나 그 기분으로 판단하고 반응한다는 것은 인격과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확실히 어리석고 경솔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내적 불안,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불화는 이 감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속의 참 평화, 우리 이웃과의 참사랑은 이 감정을 제어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기분이 좀 나쁘다거나 또 다른 사람이 좀 내 기분을 나쁘게 했다고 해서 그 기분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얼굴에 흉이 좀 묻었다 해서 생명이나 자기 인격이 더러워질리 만무한 것이기 때문에 내 생명과 인격에 관계가 없는 것이면 그 때문에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또 그렇게 나타낼 필요도 없다.
「괴테」의『젊은「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었을 때「바이마르」의 청년들은 그 소설 속에 표현된「베르테르」와 똑같은 옷차림이 유행되었고 또「베르테르」처럼 자살한 청년들도 상당히 있었다고 한다. 옷차림을 흉내내는 것 같은 기분까지는 이해되지만 그 기분 때문에 자살까지 했다는 것은 확실히 지나친 기분임에 틀림없다.
평안과 행복이란 생명이 사는 길이며 그 인격에 사는 길인 것이다. 누구 건 기분이 예민하고 감정만이 활동하는 것은 그 속에 참 생명과 인격의 깊음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기분이나 감정에 인격적 문제, 생명 적 문제가 손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속 생명 또는 인격이란 외부적 조건이나 반응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의 태도야말로 생명과 인격이 충만한 생인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멸시와 학대에도 용서를 빌으셨고 핍박하는 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나와 관계없는 일에도 공연히 기분을 개입시키는 일이 있다.「워싱턴」의 한 흑인목사가 인종분규문제에 언급해서『우리의 몸이 더럽다면 씻겠다. 버릇이 나쁘다면 고치겠다. 그러나 단지 살이 검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단지 보기에 기분이 나빠서라거나 내게 밉게 보여서라거나, 또는 나를 좀 언짢게 해서 분을 낸다면 그것은 생명과 인격을 무시하는 일인 것이다. 감정은 곧 미움이다. 그 미움은 결국 살인일 수도 있다. 「오스카·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들으라, 당신들은 사랑하는 이를 죽이고 있다. 더러는 살기에 찬 눈으로, 더러는 달콤한 말로, 비겁한 놈은「키스」로, 용감하다는 자는 검으로』그것이 감정이 저지르는 결과다.
우리생애에, 우리생활에, 우리주변에, 우리자신 속에 무관심으로 치명상을 주며 퉁명으로 기쁨을 죽이고 거짓사랑으로 참사랑을 깨뜨리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그것이 인격적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분·감정 때문에 말이다. 그 누구에게서, 그 무엇에서 감정이 상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참 인격에서 멀다는 증거이며 기분으로 남을 차별,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참 생명에서 먼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마음에 평안, 다른 사람과의 원만한 사랑의 관계는「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생명과 진리를 그 인격 속에 가지는 일인 것이다.
유명한「프스」의 조각가「로뎅」의 작품『생각하는 사람』은「프랑스」혁명을 두고 만든 조각이라고 한다. 모두가 이유도 모르고 감정 파 기분에 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를 하고 야단을 칠 때 이 광경을 보고 머리에 손을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사람을「모델」로 조각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살벌한 사회상 속에서, 이 혼란한 정국에서 감정에 들뜬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기분에 닿는 생활이 아니라 영원에 생각이 닿는 생활, 정말 진지성을 가진 생활을 해야겠다.
김창희<목사·기독교 대한감리회 총무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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