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유사』명초본으로 전면 새 해석-8년 동안 대만서 고려어 연구하고 온 진태하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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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려 때의 우리나라 말을 해명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인 『계림유사』의 명초본이 발견됨과 동시에 옛 음운의 연구가 이루어져 이제까지 반세기에 걸쳐 연구돼온 그 풀이와 음운표기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됐다. 최근 대만에서 8년간의 연구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진태하 박사(명지대·국문학)는 국립대 대만사대에 제출한 학위논문 계림유사연구에서 종래의 연구가 후대의 오자 투성이인 청판본이 의존했고 또 옛 한자 음운을 고려하지 못해 숱한 오류와 억측을 빚었다고 지적했다.
『계림유사』 는 약9백년전 북송 때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상관 손목이 우리말을 채집해 한자로 기록한 역어집. 거기 수록한 3백61단어 중 60%가 평상시 자주 쓰는 기초 어휘들이다. 한글이 제정되기 이전의 고려 때 말을 알 수 있는 기록이란 이 책 이외에 『송사』 『고려도경』 등에 단편적으로 나올 뿐 이어서 신라어와 이조어 사이의 공백을 잇는 징검다리 격 귀중 자료이다.
진 박사는 그동안 19종의 판본을 일일이 대조해 뒤엣판본의 오자들을 밝혀냈고 적어도 3백60여 단어의 절반이 그릇 풀이돼 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송 즙경(변경 즉 하남성의 개봉)지방의 당시 성운을 연구하지 못한 까닭에 그것을 고려어로 풀이할 때 전면적으로 표기상의 정확을 기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가령 여자왈만금의 경우 청판본에는 만 자가 한자로 기재돼 있어 이제까지는 한음→하님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는 명판본에 의하면 바로 마님이며, 음운상으로는 아래 초성 ㄴ이 위 종성의 받침으로 중복돼 만님으로 소리가 나온다는 견해이다.
뒷날 판본의 어자로 말미암아 풀이가 전혀 안되던 낱말로서 이번에 분명히 밝혀진 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도왈기간=청판본에는 기간으로 잘못 기재돼 풀이가 곤란했다. 기간은 복송이며 곧 복송아를 말한다.
▲취충왈흘포=청판본에는 취충이 묘 마(두꺼비)로 적혀 다음 역어와 연결이 안됐다. 냄새가 고약한 벌레 즉 갈보는 빈대며 지금도 중부지방 사투리로 남아있다.
▲거반왈모주=청판본 중엔 거반이 흐려있거나 거 자를 위 항목에 붙여 반 자만을 죽 혹은 병으로 그릇기재하기도 했다. 밥을 먹는 다의 먹자여야 아래위가 맞는다.
▲의자왈타마=청판본에는 타가 치 치 등으로 기재되 혼란을 빚었다. 도마란 칼도마와 같이 기다란 판대기에 다리를 붙여 걸터앉는 것이다.
▲궤왈고리=글자 그대로 고리인데 청판본에서는 이 자가 이 자로 오기돼 혼란을 빚었다고 진 박사는 이와같은 오류를 밝히기 위해 대만과 홍콩 및 일본을 순방했으며 계림유사로서 현재 전하는 책이 13종에 달함을 확인했다. 즉 ①함분누교인 명초세부본 ②향항대학장 명초세부본 ③중국중앙도서관장 명초세부본 ④경도대장근위문고세부본 ⑤옹정여광저고금집성본 ⑥해동역사본 등 13종인데 그중 대종을 이루는 것이 홍콩대 및 대만 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서 14세기께 명나라 초에 도종의가 펴낸 세부절록본이란 필사본이다.
그런데 일제 때 이 분야의 연구에 지대한 성과를 낸 일인 전간공작이나 해방 후 방종현씨도 한결같이 청나라 때 도정이 펴낸 중편본만을 대하였을 뿐 더 오랜 명초본을 구해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중국의 유명한국어사전인 강희자전에 계림유사의 내용이 5군데 인용돼 있음에도 모두 청판본에 의거해 옮겨놨고 일본의 대한화사전 역시 청판본을 인용했다. 진 박사는 북한의 홍기문의 이 관계 논문도 살펴보았으나 청판본에서 맴돌고 있었다고 전했다.
계림유사의 편찬연대에 관해서도 이제까지 분명치 못했던 문제. 대개 고려 숙종 때인 1102∼3양년 사이라고 짚어 보고 있었는데 이번 옛 기록을 통해 소상하게 알게됐다.
즉 북송의 사신일행은 숭령2년 계미(고려 숙종 3년·1103년) 6월5일부터 7월14일까지 39일간 흑산도를 거쳐 올라와 개성에 머물러 있었다.
진 박사의 이러한 연구성과에 대해 중국의 학계에서는 다른 면해서 상당히 주목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황하 중류 개봉지방의 고대어에 관해 기록은 계림유사 밖에 없는데 그것이 양 국어연구로서 많이 해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백에 빠져있는 고려어의 해명문제는 우리국어학계의 커다란 숙제인데 그럼에도 옛 원본을 국내에선 얻을 길이 없고 방증자료가 부족하며 특히 중국 성음학에 결정적인 핸디캡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족한 자료, 더구나 국학분야 전반에 걸쳐 해외에서의 탐색이 보다 긴요함을 입증해 준 셈이다.
진 박사는 이번 계림유사의 연구과정에서 옛 항로를 소상히 검토한 결과 송나라 때엔 개봉에서 직접 송도로 건너오지 붓하고 항주로 일단 남하했다가 흑산도로 건너와 서해안을 끼고 개성에 이르는 지도를 그리게 됐다고 밝히면서 『고려의 문학가 우리나라 서남해 지방에서 먼저 개화하는 까닭을 짐작할만하다』 고 덧붙였다.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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