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재독 산림학자 고영주 박사 (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막상 결혼은 했으나 고 박사 부부는 신혼의 아기자기한 단꿈을 흠뻑 맛보지 못했다. 곧바로 집을 구해 한집에 살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공부하는 처지에 함께 생활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 되었지만 국 여사의 근무지가 「프라이부르크」시에서 항상 50∼60km 떨어진 주변도시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주말에 고 박사가 부인의 근무지로 찾아가 하루를 함께 보내고 돌아오는 게 고작이었다.

<18년 결혼생활… 8년 함께 살아>
부인이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지난10월 「프라이부르크」시에 개인병원을 차리면서 합류하게 됐지만 결혼생활18년 동안 함께 보낸 시간이래야 기껏 8년이 될까말까한 형편이다. 이처럼 남다른 결혼생활을 하며 부부가 즐거운 때를 갖는 것은 그 동안 출생한 흥준(15)과 연준(14)의 두 아들과 함께 모일 때 아직 부모의 고국이 어떤지 듣고 읽어서만 알고 있는 두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부부가 망향의 시름을 달래는 방편이기도 하다.
지금 고 박사 부부가 살고있는 곳은 「프라이부르크」시의 구시가에서 벗어난 신흥주택가의「아파트」. 월세 700「마르크」(11만원)의 중산층「아파트」에 기거하고있다. 생활수준은 총수입이 고박사 3,500「마르크」, 국여사 4,000「마르크」가 되지만 각종 세금과 보험료를 공제하고 나면 5천∼6천 마르크(80만∼96만원)가 순수입으로 떨어져 중류 이상의생활을 하고있다.
그러나 비교적 평온한 듯한 고 박사 부부의 생활에는 늘 가실 길 없는 우수의 그늘이 깃 들고 있다. 지난 68년 느닷없이 독일정부로부터 취업금지령이 내린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그토록 장기간 서독정부 및 공공기관에 근무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일시에 생활근거를 잃게된 고 박사 부부는 귀국을 서둘렀다. 우선 고국에 돌아가 일할 자리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고 박사의 전공분야를 한국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던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일자리를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 마땅한 연구분위기를 제공할만한 부문이 없더라는 게 고 박사의 이야기였다. 난감해진 고 박사는 궁여지책으로 서독에서 일자리를 더 계속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서독인 동료가 귀띔해 준 것이 서독으로의 귀화였다. 고 박사로서는 무척 망설였다.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그에게 이 발상은 무척 괴로운 것이었다.

<아이들 교육 끝나면 귀국을>
그러나 당장의 생활방편을 유지하기 위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한국의 국적을 유지하면서 서독국적을 취득하는 방법이 없을까하는 점이었다. 몇몇 선례도 있고 해서 고 박사는 이중국적취득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서독에서 이러한 제도가 없어진지가 1년이 넘었다는 통고를 받았다. 고 박사 부부는 이 문제로 몇 주일을 고민했다. 고국으로 무작정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앞길이 너무 막막했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서독에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게 부부의 결론이었다. 고 박사는 지금까지 당시의 악몽을 잊지 못하고 있다. 『공부 끝내면 바로 돌아가야지, 우물쭈물하다간 영원한 방랑자가 돼버리고 만다』고 자신의 울적한 심경을 되뇌고 있다.
귀화 후에도 여러 차례 귀국기회를 찾았으나 마땅한 계기가 없어 그대로 주저앉고 보니 이제는 두 아들의 교육문제가 가로막혀 당장 귀국할 기회가 생겨도 꼼짝못하게 됐다고 부부는 아쉬워한다. 변명 같지만 이제는 『아이들 대학교육이나 끝나고 나면…』꼭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괴로운 마음을 달랜다고 고 박사는 씁쓸히 웃는다.
스스로 평범한 한낱 고용인으로 자처하면서도 그의 학문적 열정과 집념은 꺼질 줄 모르고 있다. 근래 들어 부쩍 한국적인 것, 동양적인 것에 관한 그리움이 복받쳐 손에 잡히는 책이 한국서적이다. 최근에 우연히 한국고대가요집을 입수하여 읽어보고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펼쳐보다가 시가에 나타난 고대한인들의 산에 관한 노래가 눈에 띄어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아직 초보적인 단계이긴 하지만 자료를 계속 입수하는 대로 고대 한국인의 산에 관한 관심과 사상을 서양인의 그것과 비교 연구하여 소개하고 싶다는 게 고 박사의 희망이다.

<유학생 만나는게 유일한 보람>
방랑인으로 자신을 비하하기는 하지만 고국을 등지고 사는 부부의 슬픔을 달래주는 유일한 기회가 「프라이부르크」를 거쳐가는 한국인 길손과 유학생들을 만나는 일이다. 1년에 한번 망년 파티가 열리면 고 박사 부부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국 여사는 20여년전 고국을 떠날 때 갖고 왔던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나와 처음 보는 한국인의 눈길을 놀라게 한다. 기다란 저고리 고름에 널따란 동정의 옛날의 한복을 6순 가까운 국 여사가 입고 나오는 게 그지없이 뜻밖이기 때문이다.
이 망년모임 때 끝까지 남아 부부가 이제는 잊혀진 「창가」를 애달프게 부르는 것을 보고 눈시울을 적시지 않는 한국인은 없을 정도다. 가까이 지내는 젊은 학생들은 신년인사를 가면 세배 돈이라고 일부러 꼬깃꼬깃하게 구긴 돈을 양손으로 꼭 쥐어주는 고 박사 부부의 손길에는 고국에 직접 전하지 못하는 따스한 체온을 안타까워하는 게 느껴져 절절한 향수에 함께 젖어들곤 한다. 【프라이부르크=김동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