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전기의 언론제도-서울대 동아문화연 학술강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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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조 전기의 왕정이 후기보다 비교적 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언관들의 강직한 언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언론은 왕권의 언론탄압으로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고나 유생들의 상소는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지만 사헌부·사간원·집현전 등에 근무하는 언관들은 유배·파직·좌천의 형벌을 감수하면서 날카로운 언론으로 사정을 바로잡아 나갔다.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제5회 공개학술강좌(14일·서울대 문리대 시청각교실)에서 『조선 전기의 언론제도』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최승희 교수(계명대·한국사)는 조선 전기의 각 왕조별 언론 횟수를 분석한 결과 『태종·세조 때가 가장 언론의 탄압이 심했던 것으로 나타났음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왕권의 언론탄압 방법도 아주 다양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최 교수의 발표논문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 주>
중국 진나라의 간관에서부터 유래된 대간제도의 언론이 우리 나라에서 확립된 것은 고려 때부터였다.
조선 전기의 언론은 사헌부·사간원 등의 공식언론기관보다는 척벌언론이 많았고 「왕권의 확립」이라는 대전제 때문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언관의 자리 역시 개국공신들이 전혀 탐을 내지 않을 정도로 별것이 아니었다.
각 왕조의 언관 이용방법과 언론 탄압책도 다양했는데 가장 심했던 것은 태종과 세조로 언관을 소인취급하며 경시했을 뿐 아니라「삼간불청칙거」라는 훈시를 내려 언론을 위협하기도 했다.
태조는 언관들을 왕권확립의 앞잡이로 십분 활용했다. 태조는 언관들이 고려왕조를 이어왔던 왕씨의 숙청을 20여 차례 간하나 불허하면서 여론이 좀더 고조되기를 기다렸다가 제거를 단행했다. 즉위 5년에는 백성들의 축성의 역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 언관들을 모두 파직시키고 반년동안 언론을 폐지시켜버리기도 했다. 태조 즉위동안의 언관들의 언론은 월평균 l·6회 정도로 극히 억압된 상태였다.
태종은 대간의 존재를 필요한 것으로 보면서도 탄압으로 일관했다. 태종 8년 좌사간 류백순의 상소에는 『전일의 소청에 언론이 왕에 거슬린다 하여 언관을 유배하였으니 밝은 시대의 처사가 아닌 줄 압니다. 나라가 창설된 이래 형을 받지 않은 언관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나와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언관들은 언론을 계속하며 그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태종의 언론탄압 방법은 ▲승정원에서 언관들의 소청을 못 올리게 하는 것 ▲사표를 낸 언관들의 복직 불허 ▲대사직을 충원치 않는 것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는 조참·조계를 거부 ▲삼간 불청칙거의 유시 ▲상소나 소청을 문서로 못하게 하고 말로 하게 하는 등의 강압과 위협에 의한 일종의 봉쇄작전 이었다.
세종도 전반에는 아버지 태종의 영향을 받아 강경책을 썼으나 집권후반에는 좀 누그러진 편이었다. 언관들의 투옥과 파직이 다반사처럼 있었는데 세종 15년 한 의금부 옥졸이 대사부의 관리를 보고 『금일에는 헌사에 있으나 명일에는 투옥되어 나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언관작에 제수되면 그 집안은 초상집같이 울음바다가 되고 앞길이 험하다 하여 친구들의 위로를 받는 일은 세종 초기에까지도 계속됐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언관들의 조그만 과오는 관대히 용서했고 징계나 탄압을 하지 않았다. 참사원과 내불당의 설치에 l백여회에 걸친 언관들의 언론이 있었지만 세종은 한번도 언관을 징계한 일이 없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세종조 후반에는 명분 있는 언론이면 비록 왕의 의지에 반한다 해도 탄압치 않음으로써 언관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유로이 언론을 할 수 있었다. 단종 대에는 의정부와 언관들의 대립이 첨예화돼 대신들은 왕을 설득해 언론을 심히 탄압했다.
김종서나 황보인 같은 대신들은 『사관의 언론이 방자한 것이라 관계하지 않는다』고 일축했고 『언관들이 대신들을 모함하니 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는 대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세종대의 월평균 4·8회의 언론보다도 훨씬 많은 7·7회의 월 평균 언론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단종 대의 언론은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의금부를 대조 직계제도로 고쳐 왕권을 강화하고 언론을 철저히 봉쇄했다.
세조는 6명의 사관을 4명으로 감원시켜버리고 유신들을 만나기를 꺼렸다. 세조 때의 월평균 언론횟수는 1·8회로 언론이 극히 탄압을 받았다.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월평균 10회의 언론이 있었을 정도로 이조 전기 중 가장 활발한 언론창달이 이루어졌다.
조선 전기의 언론은 왕권의 갖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않고 그 임무를 수행, 건전한 정치를 펴는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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