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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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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본서 활약하고 있는 조치훈 6단(18)이 최근 제22기 일본기원 선수권전에서 임해봉 9단을 물리치고 도전권을 획득했다. 일본 바둑계의 최강자인 「사까다」(판전영남) 9단과 5번기로 겨룰 조군에게는 이제 정상에의 길이 멀지 않았다. 다음은 12년간 치훈군의 뒷바라지를 도맡아온 그의 큰형 조상연씨(33·한국기원 4단)가 엮은 조치훈 6단의 도일 수업기이다. <편집자>
치훈이가 본격적 바둑수업을 위해 일본에 간 것은 그가 만 6세이던 1962년8월1일이었다. 바둑의 천재소년이라고 해서 여기저기 공식대국도 두었고 결국 일본의 「기다니」(목곡실) 9단에게 알려져 제자로 삼겠다는 공식초청이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몇 개월 전인 1962년3월 내가 일본바둑계 시찰을 위해 도일했을 때 깜짝 놀란 것은 심심풀이로 바둑을 가르쳐보았던 동생 치훈이의 실력이 일본 꼬마들의 그 누구보다도 월등하다는 것과 장래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바둑은 원래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을 거쳐서 일본에 건너갔는데 현재는 거꾸로 일본이 가장 성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오청원 9단도 어릴 때 일본에 와서 항상 제1인자의 자리를 굳혔고 근대 바둑계를 「리드」해 왔다.
그러나 예상이 적중한다면 치훈이가 과거의 모든 기록을 깨뜨리고 제1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편지와 국제전화로 치훈이의 장래성과 한국인으로 세계 제1인자를 만들어 보겠다는 끈덕진 집념에 드디어 아버지도 결심. 두 가지의 약속을 조건으로 허락을 하셨다.
첫째는 치훈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내가 일본에서 아버지 대신 돌보고 치훈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더라도 그때까지는 귀국치 말 것과, 둘째는 치훈이가 대성할 때까지 귀국시키지 말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순간 아버지는 장남과 재롱동이 막동이를 동시에 잃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7남매와 부모님의 생활을 거의 도맡아오던 내가 귀국치 않는다는 것은 아버지에게는 큰 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모든 고난을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는 참고 견디시겠다는 부모님께 다만 감사할 뿐이었다.
이해 8월1일 황혼이 짙어진 「하네다」공항에 도착한 치훈이는 부모님과 형들의 비장한 결심도 모르고 몇 달만에 만나본 형한테 천진난만하게 재롱을 피우는 데는 새삼 눈물이 날 뿐이었다. 다음날 동경의 중심지인 대수정의 「상께이·홀」에서 나와 치훈의 스승이 된 「기다니」(목곡실) 선생의 문하생 1백단돌파 기념대회가 있었다. 일본에 오기 전 미리 연락이 되어 치훈은 당시 6단이었던 임해봉 9단과 5점을 놓고 기념대국을 갖게 되었다.
이날은 두 판의 기념대국이 있었는데 다른 하나는 「사까다」(판전영남) 9단(당시 본인방)과 「기다니」 문하의 선봉장 「오오다께」(대죽영웅) 9단(당시 5단)의 대국이었다.
먼저 치훈이가 두게 되었었는데 시작하기 전에 치훈이가 나의 무릎 위에서 잠이 들어버려 두 번째로 예정을 바꾸고 말았다. 급히 화장실에 데려가 세수를 시키고 잠을 깨우느라고 주위 사람들을 당황케 하기도 했다. 대국이 시작되자 치훈이에게는 바둑판이 너무 커서 상대편 앞에다가 둘 때는 서서 두어야 될 정도였다. 1천여 장내 「팬」들은 박수를 보냈고 방석을 몇 장 더 깔아주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도일 다음날부터 행운의 「스타트」를 시작한 치훈은 전 일본 바둑「팬」의 「마스코트」적인 인기를 끌면서 최초의 목표인 초단을 따기 위해 이제부터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되어야 했다.
치훈이가 처음 왔을 때는 일본말은 물론 우리 나라 말도 시원찮았고 나 자신도 일본말이 서툴러서 당시 부산의 국제일보사 주일특파원 이준상씨가 통역을 도맡아 주었다.
그분은 치훈이가 「코카·콜라」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 다음에 「코카·콜라」사장 딸한테 장가보내주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치훈이가 원하는 대로 다 사줄 돈도 없지만 배탈이 날까봐 내가 못 마시게 하면 치훈은 한길로 뛰어나가거나 길 가다가 어디 숨어버리고 해서 가슴을 태우게 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보통 때는 속을 썩이는 개구장이인데도 웬일인지 바둑판 앞에만 앉으면 그 태도는 누구보다도 훌륭했다. 이것은 바둑이 약하니까 대신 태도 등 「매너」를 철저히 가르친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치훈은 일본서 특히 태도가 좋아 더욱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도 사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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