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장기능의 마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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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전후세계경제는 몇 차례의 경기후퇴를 겪었으나 전세계가 금년처럼 동시에 또 구조적인 불황에 함입한 적은 없었다. 경기후퇴가 비교적 심했던 57∼58년은 미·일·영의 불황이 서독·「프랑스」·「이탈리아」의 강한 상승력에 의해 부양됐고 66∼67년은 서독의 후퇴가 미·일에 의해 견제되었다.
때문에 전후 대본주의의 불황내구성이 과신되고 자본주의의 항구적인 번영이 예언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사태는 기존관념을 당혹케 하고 있다. 부가가치 면에서 대본주의경제의 80%를 점하는 미·서독·일·불·이·영 6개국경제가 동시에「인플레」속에서 장기불황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전후 몇 차례 있었던 경제활동의「사이클」적 상하파동의 범위를 훨씬 넘은 심도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아도 75년 상반기까지는 지속될 이번「스태그플레이션」은 단순한 경기순환이상의 전후경제체제의 노후와 모순에서 빚어진 구조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전후세계경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기반 위에서 번영해왔고 또 이를 위한 자본집약적 생산과정의 심화는「에너지」와 자원의 낭비를 재촉했다.
그러나 유한한 지구 위에서 무한한 성장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원파동이나「오일·쇼크」는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아 최근의「오일·쇼크」나 불황은 잘못된 문명방식에 대한 자연적 제동작용이라 보는 견해조차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입장은 차치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아도「인플레」속의 장기불황은 현대자본주의경제의 병리를 실감케 하는 사태다.
경제「시스팀」의 평형적 조정기능은 마비되고 시장「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 않고 있다. 현대경제학에서 말하는 자유경제체제의 기본은 신 고전파적 시장경제체제에「케인스」적 경기조정정책의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이러한 바탕아래선 물가가 오르면 총수요억제를, 불황이 되면 유효수요창출을 하면 된다. 이러한 전통적 처방전은 현재의 증상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벌써 자본주의경제의 바탕인 시장기능이 작동치 않기 때문이다. 시장기능의 마비는 노동시장에서 두드러지다. 노동조합의 강화에 의해서 호·불황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항상 상승세에 있으며 이는「코스트·푸쉬」작용을 한다.
또 경제의 공유화폭이 넓어짐으로써 민간자산시장의 범위가 그만큼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국제수지면에 있어서도 과거 금본위제때와는 달리 자동조절이 안 된다.
물론 어느 경제체제나 항상 결함이 있기 마련이다. 전후 세계경제가 상하운동을 반복하면서도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한 것은 여러 내적 결함이 미국의 강력한「리더쉽」에 의해「커버」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절대적인 우위성을 갖고「마셜·플랜」과 잉농물수조, 또 IMF(국제통화기금)체제를 통해 세계경제의 질서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 정세변화는 구질서의 노후와 내적 결함을 현재화시켰다.
이번 장기불황이 비록 중동전과 석유파동으로 점화되었지만 그 불씨는 오래 전부터 누적되어 온 것이고 71년「닉슨」선언·「달러」파동·총 변동제 돌입 등이 그 서곡이라 생각할 수 있다.
강력한「리더쉽」의 해소는 필연적인 추세이기도하다. 산유국「파워」의 강화와「오일달러」의 누적은 세계적인 교역확대와 성장정책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석유가인상은「코스트·푸쉬」와 비산유국의 국제수지압박이라는 이중적인 부작용으로 전세계에 파급되었다.「인플레」와 국제수지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각국은 총수요 억제책을 강화했고 이는 불황진입의「레일」이 되었다.「오일달러」의 산유국집중이라는 극도의 유동성 편중이 해소될 수 있는 시장기능이나 제도적 장치가 아직은 미비상태다.
50년대의「달러」부족은 미국의 수조 등을 통해 환류됨으로써 세계경제의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 이젠 재환류「채늘」이 막힘으로써 유동성의 국제적 순환을 통한 공동번영의 길이 폐쇄상태에 있는 것이다.「달러」의 금태환정지·총 변동환율제의 돌입에 의해 균열된 IMF중심의 전후국제금융질서가 석유파동으로 결정적 파국을 맞은 것이다. 또 기성관념에서 본다면 석유가가 1년에 4배나 오르는 사태는 있을 수 없다. 수급법칙에 의해 수요가 격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석유가격폭등후의 소비추세에서 보듯이 가격상승에 의한 수요감퇴는 극히 미비하다. 생산 및 소비면에서 벌써 석유소비「패턴」이 경직화해버린 것이다. 시장기능의 마비를 뜻한다. 또 독과점의 강화에서 가격의 하방 경직성도 시장기능마비의 한 면이다.
특히 국제수지불균형의 자동조정기능의 상실은 범 서방경제의 동시파국을 가속시키고 이는 역설적으로 새 질서의 형성에 강한 자극요인이 되고 있다. 현재의 불황은 변동제 아래서 가능했던 과열성장과 자원파동으로 조성된「인플레」를 강력히 수속하려한데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고전적인 세계시장공항이 아니라 전후경제체제의 결함이 각국의 경제취약성과 병발되어 동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세계불황은 전후복제의 붕괴와 이에 대체될 새 질서의 편성과정에서 생긴 필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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