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4)제41화 국립경찰 창설(12)|<제자 김태선>김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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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무부 차창 최경진 해임>
한때 조병옥 경무부장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경무부 차장 최경진씨(6·25때 납북)도 수도청 사람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모략을 받아 해임 당해야했다.
당시 경무부에서는 수사과장 장모씨가 같은 경무부의 통신국장 조모씨를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불러다 수사를 한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무부의 국장들이『아무리 혐의가 있다 해도 일개 과장이 국장을 과장실에 데려다놓고 수사를 해야한단 말인가』고 흥분했다.
교육국장 김정호씨의 발의로 보안국장 한종건(현 변호사)총무국장 조주영(현 변호사)씨 등이 장 과장을 불러놓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장 과장은『차장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할 수 없다』고 발뺌했다.
국장들은 최경진 차장을 찾아가『당신이 수사과장에게 통신국장을 수사하라고 지시했느냐』고 따지자 최 차장은『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말은 들은 국장들은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몰려가『수사를 중단하고 최 차장을 파면해달라』고 요구하고 만약 이 같은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국장들이 전원 사표를 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조병옥 경무부장은『여러분이 다 그만두어도 나는 최 차장은 못 내놓겠다』고 국장들의 요구를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조 부장의 단호한 태도에 기가 꺾인 국장들은 할 수 없이 그대로 물러나가 사태만 관망하고 있었다.
그 뒤 약1주일쯤 지났을 때 누군가가 최경진 차장이 나와 함께 장택상씨를 마중하러 서울역에 나갔다는 사실을 조병옥 부장에게 이야기했다.
조 부장은 당장 국장들을 모두 배석시킨 가운데 최경진 차장을 불러다놓고 사표를 내라고 호통쳤다.
최 차장은 내가 해임된 지 약2주일 뒤에 같은 이유로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최 차장이 나와 함께 서울역에 장 청장 마중을 나갔다는 사실을 조병옥 부장에게 얘기해 준 사람은 그때 역시 장 청장을 마중 나왔던 낭산 김준연씨로 알려져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최경진 차장의 후임에는 경무부 보안국장으로 있던 한종건씨가 임명됐다.
정판사 위폐사건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경무부에서는『수도청 본정서(현 중부경찰서)에서 공산당을 고문하다 치사케 한 끝에 시체에 돌을 매달아 한강에 버렸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은 경무부 사람들의 밀고로 미군정사령관「하지」중장에게까지 알려졌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경찰의 고문이었다. 고문은 비민주적이며 인권유린이란 이유로「하지」장군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경찰에 대해 고문을 못하도록 강조해왔었다.
「하지」장군의 추궁을 받은 장택상 수도청장은 불같은 성질을 이기지 못해『조병옥이가 나를 잡으려고 꾸며낸 조작극』이라고 펄펄뛰면서 현장조사를 하자고 제의했다.
미군 헌병들과 경무부에서 사흘동안 한강을 수색했으나 시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체가 나오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은 조병옥 경무부장은『꾀 많은 장택상이 미리 손을 써 시체를 없앴겠지』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창랑의 성격이 불같이 팔팔한데 비해 유석은 언제나 능청스럽기만 해 대조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창랑도 유석의 비행을「타이프」한 서류를「하지」와 이승만 박사에게 보내기도 했다.
정부수립을 앞두고 내무부장관 후보에 유석과 창랑이 모두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립이 너무 심해서 유석을 시키면 수도청 출신들이 녹을 것이고 창랑을 시키면 경무부 출신 사람들이 서리를 맞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 중 어느 쪽도 내무부장관은 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초대 내무부장관 자리는 건국전야의 혼란한 시국을 바로잡고 공산당 타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두 사람을 제쳐놓고 윤치영씨에게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감정대립은 정부수립 후에도 계속됐다. 51년3월 6·25동란중 이 대통령을 방문한 창랑이 이 박사에게『선생님, 저는 40년 가까이 선생님을 모셔오지만 한번도 이런 부탁을 드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꼭 부탁드려야 하갔습니다. 내무부장관을 갈아주십시오. 조병옥은 의리도 없는 사람입니다』고 간청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유석은『고얀 놈, 제 나이도 60이 가까운데 조병옥이 헐뜯는 일로 과업을 삼겠단 말인가』하고 응수했다.
이에 앞서 51년 3월22일 국회부의장으로 있던 창랑은 국회 제10회기 46차 본회의에서 서울 수복 시찰보고를 마친 뒤 당시 내무장관으로 있던 유석을 매섭게 비난했다.
창랑은 국무위원석에 앉은 유석을 흘겨보며『내무부 장관이란자가 이럴 수 있소. 한달 30일을 하루같이 요릿집을 하룻밤에도 대여섯 군데씩이나 돌아다니며 계집 손잡고 술 마시고 요릿집 앞에는 총을 멘 순경이 보초를 서게 하고…. 눈이 시어서 쳐다보지 못할 고급자동차를 타고 다니니 이런 법이 있단 말이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호위경찰관이나 고등검찰청장을 국회에 불러 질문해 봅시다』라고 퍼부었다.
초창기 경찰 수뇌부의 대립은 정부수립을 앞두고 경찰의「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두 사람을 견제해서 독주를 막으려는「하지」장군의 작전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장군은 유석을 보고는『당신이 최고요』라고 칭찬하고 창랑을 보면『한국에는「치프」장이 제일이야』하고 치켜세우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유석과 창랑은 누가 뭐래도 업무를 떠나서는 다정한 친구였으며 서로의 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두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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