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혁명"에 밀려난 봉건 정치|셀라시에 황제 폐위의 경위와 의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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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셀라시에」「이디오피아」 황제의 폐위로 끝난 8개월간의 장기 군부 「쿠데타」는 집권만을 노리는 후진국 「쿠데타」의 유형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다.
기원전 「솔로몬」왕과 「시바」의 여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설적인 개국으로부터 2백25대로 이어지는 왕조를 자랑하는 「이디오피아」는 60년대를 통해 「아프리카」를 휩쓴 일대 혁명기 속에서도 봉건 왕제의 전형적인 통치 체제를 조금도 개혁함이 없이 존속해 왔다.
문맹율 90%의 무지 속에서 소수 지배 계급과 다수 피지배 계급이 확연히 구별되었으며 그 영향은 서구에서 시민 혁명이 있기 이전의 참담한 사회 현상을 빚고 있었다.
귀족 계급이 농지의 45%, 교회가 28%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90%는 농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년 동안 극심한 한발이 계속되자 수십만명의 아사자가 생겨났으며 기근은 사회적 모순을 더욱 처절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국내 불안이 처음 터진 것은 지난 2월 북부 지방의 군대가 봉급 인상과 사회 개혁 등 22개항 요구 조건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때부터였다. 이들은 자기들의 요구가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자 일단 반란을 중단했지만 이 사건은 그때까지 불만이 누적돼 온 다른 세력, 노동자· 농민·대학생들에게 행동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곳곳에서 파업과 「데모」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에 대처하는 지배 세력의 태도는 개혁을 요구하는 대세를 감당하기에는 어처구니없이 구태 의연한 것이었다. 「셀라시에」 황제는 헌법 회의를 열고, 새 내각을 구성, 입헌 군주제로의 이행을 약속했지만 새로 임명된 「마코넨」 내각은 군부가 요구하는 부패 일소를 외면, 부패 관리들을 옹호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에 본격적인 「쿠데타」가 6월말에 왔다. 육·해·공군·경찰·지방군 및 황제 친위대에 속해 있는 소장파 장교들은 군사 조정위를 구성하고 기존 지배 계급인 부패 황족과 황제 측근의 체포에 역점을 둔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7월9일 13개항의 개혁안을 발표하고 새 헌법 제정을 통한 민주화의 촉진과 부패한 지배 계급의 숙청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이들의 요구는 온건한 것이어서 주헌 군주제로 「셀라시에」 황제의 명목상의 존속은 용납할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까지도 구 체제파는 새로운 바람을 외면하고 황궁을 피난처로 삼고 황제를 방패로 삼았다.
이리하여 군부는 드디어 목표를 황제 자신에게로 겨누기 시작했다. 황제의 측근들이 하나씩 체포되었고 체포를 거부하는 자는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군부의 용인 하에 군중들은 『황제는 도둑놈, 국민들에게 똥을 퍼붓는 도둑놈』이라는 모욕적인 구호를 쓰기 시작했으며 황제 자신의 부정 부패가 들춰지기 시작했다.
「이디오피아」「쿠데타」는 이리하여 구 집권 세력 대부분의 도태로 1단계가 완료된 셈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군 소장파들의 의도하는바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문제는 이들 젊은 「군인 개혁가」들의 정치적 미숙에서 오는 것이고 둘째는 정치의식이 발달하지 못한 국민들의 일방적 불만 폭발을 어려운 경제력으로 어떻게 무마하느냐는 것과 세째는 구체제의 반격 가능성이다.

<장두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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