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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냉키 이후의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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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벤 버냉키 미 연준 의장이 지난주 퇴임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는 전대미문의 통화정책을 펼쳐 미국과 세계경제를 대공황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만약 그가 위기 당시 연준 의장을 맡고 있지 않았더라면, 또한 과감한 통화 팽창 정책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창밖으로 뛰어내린 생명들이, 학업을 중단한 젊은이들이, 직장에서 거리로 쫓겨난 가장들과 파괴된 가정들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물론 이는 버냉키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연준 이사회와 집행부, 그의 정책을 지지해준 의회, 언론, 학계, 정부 모두의 합작품이다. 그러나 버냉키 의장이 신용정책과 대공황 전문가로서 쌓아놓았던 탄탄한 학문적 평판과 이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없었더라면 그가 펼친 비전통적 통화정책은 더 많은 비판과 반대에 직면해 그만한 성과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닦은 연구와 학문을 바탕으로 직접 조타실의 키를 잡고 미국과 세계경제를 폭풍우 속에서 격랑이 잦아든 바다로 안전 운항을 해냄으로써 세상에 기여했으니 보람을 느끼며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과제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았다. 위기 극복을 위해 펼쳤던 비상한 통화정책은 이제 정상화의 길을 찾아가야 하며 이 길이 끝날 때쯤 아마 그의 정책에 대한 진정한 평가도 가능해질 것이다. 신용이 늘어날 때 시장은 반색을 하나 신용이 축소되고 금리가 오르면 여기저기 균열이 생기고 불편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그의 후임 재닛 옐런 의장의 몫으로 남았다. 또한 이의 파장으로 출렁거릴 신흥국 경제의 안전 운항은 이들의 정부와 중앙은행의 몫으로 남아 있다. 과거 많은 금융위기가 신용이 팽창했다 축소되는 과정에서 일어났으며 이번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과정에서도 지구촌의 여기저기서 희생자가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과제는 위기를 발생시켰던 시스템의 결함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정보화의 진전은 소득분배를 빠르게 악화시켜 왔다. 미국에서는 1975년 상위 10% 근로자의 임금이 하위 10% 근로자 임금의 약 3배였으나 2005년에는 이것이 5배로 늘어났다. 상위 1% 가계의 소득은 76년 전체 소득의 8.9%였으나 2007년에는 23.5%로 늘어났다. 컴퓨터가 단순노동을 대체하고, 중국과 신흥국들의 수출이 비숙련공들의 일자리를 앗아감에 따라 이들의 소득이 정체되고 삶이 불안해진 것이다. 미국 정치는 이에 대해 근본적 대책을 강구하는 대신 쉬운 출구를 찾으려 했다. 금융규제 완화, 신용팽창, 가계대출의 확대로 서민들의 ‘마이홈’ 꿈을 이루게 하고, 집값 상승으로 담보가치를 높여 더 많은 대출, 더 많은 소비를 가능케 해줌으로써 서민들의 불안한 삶을 달래고 이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공황 이후 최대의 금융위기였다.

 위기 이후에도 혁신과 구조조정은 없었다. 금융규제가 일부 강화되었으나 경제의 근본적 인센티브 체계는 바뀌지 않았다. 과잉 유동성으로 발생한 위기를 더 많은 유동성 팽창으로 일단 달랬을 뿐이다. 지금 미국과 세계경제가 회복되고 있는 것은 위기로 인한 심리적 공황으로부터 시장과 경제주체들이 조금씩 평정과 정상을 되찾아가기 때문이다. 버냉키의 통화정책은 여기까지 기여했다. 그러나 통화정책이 혁신과 구조조정을 대신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화, 정보화의 추세는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며 소득격차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위기 이후 2012년까지 4년 동안 미국의 상위 10%는 전체 소득 증가의 154%를 가져갔으며 나머지 90%는 실질소득 감소를 겪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시스템 혁신을 통해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교육받을 기회를 보다 균등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들의 교육기회와 평생소득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금의 시스템으로부터 과거처럼 본인의 성실과 재능으로 보상받는 시스템으로의 복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 전반의 경쟁의 틀과 분배구조의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 혁신은 현상유지를 원하는 기득권과의 어렵고 긴 싸움을 이겨내야 하며 또한 빠른 성과를 거두기도 어렵다. 정치인, 경제주체들이 각자 지금의 인센티브 시스템하에서 택하는 최선의 선택이 사회 전체로 모아지면 위기를 키우고 경제를 병들게 하는 것이 오늘날 정치, 경제시스템의 문제다. 이러한 시스템을 개선시켜 보려는 노력은 오직 위기 시에 반짝 주목을 받다가 경제 회복과 더불어 힘을 잃고 만다.

 버냉키는 그의 통화정책으로 그 자리의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세계화, 정보화의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