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클리닉] 신용불량자가 된 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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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 딸을 둔 50대 가정주부입니다. 함부로 신용카드를 써대는 막내딸 때문에 온 가족이 살맛 안나는 상황입니다.

막내딸 은주(22.가명)는 전문대를 나와 무역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제 언니들처럼 성실한 아이였습니다. 사치는 커녕 한달 용돈을 10만원 이상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낭비 시작

그러던 은주가 2년 전 취직과 함께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얼핏 봐도 수십만원은 돼보이는 옷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사들였습니다. 명품 가방.구두도 샀습니다. 고급 화장품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습니다.

1백만원도 채 안되는 월급으로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걱정이 됐지만 "회사 다니려면 이 정도는 입어야 한다"는 말에 그냥 넘기곤 했습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대학원까지 진학한 두 언니에 비해 어린 나이에 돈을 벌러 다닌다는 것이 기특하기도 했고요.

몇 달 뒤 은주가 서울의 큰 회사로 직장을 옮기게 됐다는 말에 가족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가족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은주는 거리낌없이 신용카드를 긁어댔나 봅니다.

더 비싼 옷.구두.가방을 끝도 없이 사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가을까지 가족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은주가 신용카드 다섯장을 가지고 '돌려 막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가을 은주가 처음 가족들에게 손을 벌렸을 때 연체 금액은 60만원 정도였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사는데 형편이 넉넉지 못합니다.

하지만 큰돈이 아니었기에 "아껴 써라"는 꾸중과 함께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다시 수백만원의 청구서가 날아들었습니다. 기가 막혔지만 막내딸을 신용불량자로 만들 수도 없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갚아줬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1천만원이 넘는 카드 연체대금이 청구됐습니다.

*** 번번이 약속 안지켜 믿을 수 없어

우리 형편에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은주를 집으로 불러 "어디 썼느냐"고 아무리 호통쳐도 "면목없다"며 눈물만 흘릴 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갚지 못한 상태로 몇 달을 끌자 딸은 끝내 신용불량자가 됐습니다. 그러자 은주에게 카드사들의 독촉 전화가 시작됐습니다. "몇월 몇일까지 갚지 않으면 가재도구 차압에 들어가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은주가 휴대전화를 꺼두자 이번엔 고향집으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서로 다른 카드사들이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와 가족들이 전화벨만 울려도 깜짝 깜짝 놀라기 일쑤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남편과 저는 사금융회사에서 비싼 이자를 물고 돈을 꿔 은주의 카드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동네에도 자녀의 카드 빚 때문에 고민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옆집 경미네는 4천만원이나 갚아줬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이 지금까지 갚아준 은주의 카드 빚은 2천만원이 훨씬 넘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빚을 다 갚았기 때문에 조만간 신용불량이 풀려 은주가 다시 카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는 카드를 안 쓰겠다"는 딸을 믿고 싶지만 한두 번 속은 것이 아니라 걱정이 됩니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광주에서 은주(가명)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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