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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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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설 연휴 두 번이나 극장을 찾았다가 ‘매진’이라는 통보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요즘 극장가에서 조용히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코엔 형제 감독의 음악영화 ‘인사이드 르윈’이다. 지난달 29일 전국 50여 개 관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5일까지 누적관객 5만 명을 돌파했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라는 이름값을 고려하더라도, 소규모 개봉 예술영화로는 이례적인 기록이다.

 주인공은 1960년대 뉴욕에서 활동 중인 무명의 포크가수 르윈(오스카 아이삭)이다. 가진 것은 기타 하나와 낡은 가방이 전부. 뚜렷한 거처도 없이 만나는 이들에게 “소파 비어 있냐”며 잠자리를 구걸하는 신세다. 함께 노래하던 친구는 자살했고, 솔로 앨범을 발표했지만 반응이 없다. 어쩌다 맡게 된 고양이를 안고 시카고로 오디션을 보러 떠났으나 소득 없이 돌아온 르윈, 노래를 포기하고 선원이 되기로 결심하지만 일이 꼬이면서 ‘꿈으로부터의 탈출’도 무산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 [사진 블루미지]

 영화에는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별명에 딱 들어맞는, 지독하게 불운한 한 남자의 일주일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내용은 우울하고 화면은 황량한데, 보는 내내 마음이 출렁인다. 영화 전체를 감싸안는 낭만적인 포크송의 덕도 크지만, 그보다 인상적인 건 주인공 르윈의 무심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친구가 “루저”라며 욕을 퍼부을 때도, 음반제작자에게 “팔리지 않을 것 같다”는 거절을 당하면서도 주인공은 그저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 인생은 왜 이러냐’며 좌절하거나 성공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지도 않는다. 산다는 게 원래 그런 것이란 걸, 작은 행운과 불운이 거듭되며 오늘과 비슷한 날들이 이어질 뿐, 드라마틱한 반전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걸 아는 이의 눈빛. 그리고 아무리 삶이 장난을 친다 해도 쉽사리 동요해 주지는 않겠다는 초연함이 담긴 표정이다.

 평일 저녁, 한 대학 안에 있는 작은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상영 직전까지 극장 앞 테이블에 둘러앉아 시사상식 스터디를 하고 있던 몇몇 취업 준비생들과 함께였다. 영화가 끝나자 “아, 대박!” 한마디를 주고받은 후 뿔뿔이 흩어지는 학생들. 커다란 배낭을 지고 터덜터덜 걷는 그녀에게 얼마 전 읽은 박노해 시인의 조언을 들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인생을 선물로 받았다. 일자리가 없다고 돈이 적다고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한다. 만약 돈을 벌게 되면 그 반대로 행동할 것인가.”(본지 2월 5일자 인터뷰 중) 작은 초승달이 뜬 쌀쌀한 밤이었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