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EC121기 피추때 왜 북괴 보복폭격을 안 했나|「칼브형제」저『키신저』에서 밝혀진 내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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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워싱턴=김영희 특파원】북괴가 1969년4월 미국정찰기 EC-121을 동해에서 격추했을 때「키신저」가「닉슨」대통령에게 북괴에 대한 보복폭격을 건의한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키신저」의 건의가 어떻게「닉슨」에 의하여 거부되고「키대한신저」는 어떻게 체면을 살리면서 북괴에 조치에 관해 강경론에서 신중론으로 부드럽게 입장을 바꾸었는지는 이번에『CBS의「칼브」형제』라고 불리는「버나드·칼브」와「마빈·칼브」형제에 의해 비로소 밝혀졌다.
「키신저」장관의 절친한 친구들인 이들 CBS의「스타」기자들은 최근 발간한『키신저』라는 책에서 당초 합참 회의와 함께 보복폭격을 제안했던「키신저」가「로저즈」당시 국무장관의 반대에 부닥치고「닉슨」대통령이 그의 건의를 선뜻 채택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신중론으로 태도를 바꾸었다고 밝혔다.
그때「키신저」는「닉슨」대통령과 함께 장시간 북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고는 국가안보회의를 소집, 의견을 들어본 결과 대다수가 보복반대로 나타나자「닉슨」대통령에게 보복공격은 소련과 중공과의 관계개선이라는 보다 큰 목적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 책 중에서 EC-121사건부분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69년4월15일 승무원 31명을 태운 EC-121정찰기가 동해 상에서 북괴에 의해 격추되었다는 보고가 국방성에 타전되어왔다. 상오1시5분 국방성은 국가안보위 상황실에 이 사실을 알렸다. 1시7분 당직자가 이 사실을「헤이그」(당시 국가안보담당 대통령보좌관)에게 전화로 연락했고 4분 후「헤이그」는「키신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존슨」행정부 때 같으면「키신저」의 직위에 있었던「로스토」특별보좌관이 즉각 대통령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키신저」는「닉슨」에게 즉각적인 보고를 하기에 앞서 세부상황이 보고될 때까지 기다렸다. 2시25분 첩보기가 북괴에 의해 격추되었다는 상세한 내용이 들어왔다. 이때서야 비로소「키신저」는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닉슨」은『내가 지금 할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키신저」는『아니요. 지금 모든 상황을 취합하고 있읍니다』라고 대답했다.
「키신저」는 상오7시에「닉슨」에게 다시 전화를 하고 상오8시에 백악관「오벌·룸」에서 두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했다. 「키신저」는 지도와 국무·국방성으로부터의 첫 보고서를 들고 나타났다.
「닉슨」은『내가 알고 싶은 것이 꼭하나 있다. 격추된 정찰기가 사고당시 12「마일」영해밖에 있었는가, 안에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키신저」는『북괴 해안으로부터 약90「마일」지점을 비행하고 있었다』고 답변했다. 「닉슨」은『분명하냐』고 재차 물었고「키신저」는『틀림없다』고 확답했다.
그리고서「닉슨」은 자신이 직접 지도를 관찰할 필요는 없으며 가능한 군사·정치적인 대응책에 대한 보고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닉슨」은 자기가 단안을 내릴 때까지 EC-121기와 비슷한 정찰비행을 중지하도록 명령했다.
「닉슨」은 그 전해 1월「푸에블로」호가 북괴에 납치되었을 때「닉슨」은「존슨」대통령이 북괴의 침략행위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고 공격했었다. 그는『미국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실추 되었길래 북괴와 같은 4등 군사국이 공해 상에서 미국의 해군 함정을 납치하느냐』고 따졌던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닉슨」은 그의「비전」의 방향을 바꿨다.
23일 하오6시부터 24일 상오3시까지「키신저」는 국가안보회의(NSC)조사「그룹」을 주재, 대안조치에 관한 보고서를 마련했다.
이 보고서는 대통령에 제출됐고 24일 두 차례의 별개회의가 예정됐다. 합참의장은 북괴에 대한 보복폭격을 건의했다. 「키신저」는 합참의 건의안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대통령도 그 건의를 받아들일 것 같았으나「로저즈」가 대통령에게 소련이나 중공 또는 중·소 두 강대국이 북괴의 방위책임을 떠맡을 가능성에대해 더 심사숙고 하여야한다고 강조했다.
25일 내내「키신저」는 국가안보회의의 다른 연구단 회의를 주재했는데 그 연구단은 미국이 북괴를 폭격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에 일어날 사태에 대비하여 아주 세밀한 두 개의 각본을 준비했었다.
「닉슨」은 이 결정을 분석했으나 그는 여전히 폭격명령을 거부했다. 그 대신「닉슨」은 북괴에 항의를 하고 EC-121정찰기는 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귀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표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가졌다. 「닉슨」은 그의 결정이『예비조치』의 하나임을 강조했다. 「닉슨」성명은 평양방송에 의해『무력도발』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그날 하오「닉슨」은「키신저」와 오랫동안 위급 사태를 논의했다. 「닉슨」은 안보회의위원들의 의견을 표결에 붙여보라고 지시했다. 「키신저」는 한시간 후 안보위의 고위관리들이 보복폭격을 반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키신저」는 다시 그의 의견을 요청 받았다. 「키신저」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보다는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답변했다. 「키신저」는 미국의 대응조치가 조직적이어야 하고 또 교묘해야 한다고 말했다. 「키신저」는「닉슨」대통령이 북괴기지에 대한 즉각 보복시위를 해야한다는 모든 건의를 거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키신저」는 북괴도발에 직면하여「로저즈」의 자제론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그는 보복시위는 미국의 대소·중공관계를 재조정해야하는 보다 광범한 목표에 훼방을 놓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날 밤「닉슨」은 보복폭격을 않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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