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이광요의 싱가포르|성병욱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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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싱가포르」는 무척 깨끗한 도시다. 재래식 중국상가와 현대식 고층건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있다. 사흘밖에 있질 못해 구석구석 보지는 못했지만 길에 오물이나 휴지조각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68년에「아시아」에서 가장 청결한 도시상을 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도 예전부터 이렇게 깨끗한 곳은 아니었다. 이광요 수상이 집권한 후 전개한「클린·캠페인」과 강력한 제재로 이룬 것이다.
이제는 몸에 배 그런 사람도 없지만 길에 오물을 버리든가 침을 뱉다가 적발되면 미화 2백「달러」의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한 59년부터 15년간 집권해온 이광요 수상은 지금의「싱가포르」를 만든 장본인. 이광요를 모르고 현재「싱가포르」를 이해할 순 없다. 「싱가포르」엔 그의 사진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의 입김이 도처에서 느껴진다. 이 도시국가의 번영에서, 유별난 청결에서, 국민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에서 이광요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수상은 가부장적이고 오만한 지도자란 얘기를 듣는다. 불과 면적 5백81평방㎞, 인구 2백20만명밖에 안 되는 도시국가의 지도자지만 그의「프라이드」는 세계 어느 나라 지도자만 못지 않다.
그의 경력을 보면 그런「프라이드」를 가질 만도 하다. 영국의 명문「케임브리지」대학의 최우등생인 수재로서 집권과정에서 손을 잡았던 공산세력을 집권 후 몰아냈고, 「말레이지아」와 결별독립 후 심각한 경제불안을 극복하고 연10%의 경제성장을 유지한 정치·경제면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얼마 전까지도「싱가포르」는 중계무역항, 상업도시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빠른 속도로 공업화의 길을 달리고있다.
습지였던 섬의 동남부「주롱」지대를 매립해 근대적인 공업단지가 만들어졌고 여기에 약5백개의 공장과 함께 상점·수영장·「골프」장이 들어섰다.
이「주롱」단지가 대성공을 거둔 뒤 추가로 12개의 비슷한 공업단지가 설치되었다.
「싱가포르」공업화의 대종은 정유공업으로 1일 정유능력은 50만「배럴」이 넘는다. 그밖에 일본의 조선업, 독일의「로라이·카메라」, 미국의「제너럴·일렉트릭」, 화란의「필립스」등이 진출했다.
이러한 급격한 공업파로 65년 독립당시 실업자가 5만명이던 것이 지금은 노동력이 부족해연10만 이상의「말레이지아」노동자가 유입되는 실정이다.
외국자본이 다투어「싱가포르」에 진출하는 까닭은 1백% 외국투자허용, 자유로운 과실송금, 정부의 투자회사 생산품 우선 구매 등의 시책에다 관료들이 부패되어 있지 않아 일 처리가 신속하기 때문이라 한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에서 아마 유일하게 관료의 부패가 없는 나라다. 관리들은 돈은 물론 직무와 관련해 선물도 받지 못한다. 거절하기 곤란해 선물을 받을 경우엔 상사에게 신고해야 한다. 신고를 하면 선물액수만큼 다음 급료에서 공제된다.
얼마전 공항직원이 외국인으로부터 10「싱가포르·달러」(미화4.2「달러」)를 받았다고 해서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이 정도 일이 이렇게 문제될 만큼 이 나라에선 관료부패가 상상하기 힘들다.
청렴 풍조는 이광요 수상의 청교도적인 고집의 영향 때문이다.
이광요는 수상이 되자 그의 부모와 형제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그에게서 특별한 고려를 기대하지 말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중국인의 정초인 구정 한번을 제외하곤 부모도 찾아 뵙지 않겠다고 했으며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1년에 한번 가족이 만나더라도 정치얘기는 않는다는 것이다. 「엘리자베드」여왕이「싱가포르」에 왔을 때 그의 부모가 전화로 여왕을 알현하고 싶다는 특청을 한일이 있다. 마지못해 그는 부모의 청을 받아들였는데 수백명을 초청한「리셉션」에서 그의 부모를 여왕에게 소개했을 뿐이다.
그는 이 정도로 족벌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개인당 국민소득 연 1천8백「달러」에 이르는 경제번영, 중국·「말레이」·인도인 등 다수종족의 조화, 사회기강확립 등 찬연한 업적을 세운 이광요의「싱가포르」에도 어둔 면이 없지 않다.
그의 철저한 반대세력 탄압이 그렇다.
59년에 집권한 후 당내에서 공산세력을 몰아냈으며 63년부터 정적을 대거체포, 재판도 없이「창기」교도소에 무한정 수감해왔다. 구금중인 정치범의 숫자는 1백명 이상에서 7백명까지 갖가지 설이 있으나 71년 정부가 공식 인정한 수효는 69명이다.
이러한 야당탄압으로 68년 총선거부터 야당이 총선거를 거부해 이 수상이 서기장인 인민행동당이 68년과 72년 총선거에서 의회의 전 의석을 독점했다. 언론통제도 철저하다. 신문발행허가를 1년 단위로 하여 매년 경신하는 제도를 도입, 숨통을 누르고있다. 이미「헤럴드」·「선」·남양신보 3개 신문을 폐간하고 언론인을 재판없이 구금했다.
또 대학에 들어갈 사람은 학교성적이나 공부성적과는 관계없는 정부의 자격증명을 받아야 한다. 이 증명은 본인과 가족의 정치적 배경을 기초로 보안담당 부서가 발행한다고 한다.
이렇게 강력한 독재를 하면서도 이 사심을 파헤친「T·J·S·조지」의 저서가「싱가포르」서점에서 버젓이「베스트셀러」로 팔리고있는 현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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