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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베토벤'은 사기였다 … 청각 장애 사무라고치 "18년간 딴 사람이 대신 작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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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금까지 내가 써온 곡은 모두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일본의 청각 장애 스타 작곡가의 충격적 고백에 일본 열도가 술렁이고 있다. ‘현대의 베토벤’ 등으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무라고치 마모루(佐村河內守·51·사진)가 문제의 인물이다. 사무라고치는 5일 변호인을 통해 자신이 최근 18년간 발표해온 작품들이 악곡의 구성과 이미지만 자신이 제안한 것이고 나머지는 별개의 인물이 작곡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은 6일 발행되는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에서 폭로될 예정이었고, 사무라고치 측이 하루 앞서 백기를 든 것이다. 그는 “팬들을 속이고 관계자를 실망시킨 데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히로시마(廣島) 출신의 피폭 2세인 사무라고치는 서른다섯 살 때 청각을 완전히 잃었음에도 ‘교향곡 제1번 히로시마’ 등을 작곡해 미국 언론에서 ‘일본의 베토벤’으로 조명받았다. 대표작 ‘히로시마’는 2008년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하원의장 회의 기념 콘서트에서 초연된 뒤 2011년 음반으로 발매돼 18만 장 이상 팔렸다. 그는 또 동일본대지진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쓴 레퀴엠을 토대로 피아노 소나타 2번을 발표했다. 이 곡은 지난해 9월 요코하마(橫濱)에서 한국의 피아니스트 손열음에 의해 세계 초연돼 화제가 됐다.

 자전적 수기에 따르면 그는 네 살 때 피아노를 시작해 독학으로 작곡법을 익혔다. 열일곱 살 때 원인 모를 편두통 등을 겪으며 청각 장애를 안게 됐다. 청력 상실 뒤에는 절대 음감과 손으로 느끼는 진동에 의존해 작곡을 계속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고백으로 수기의 진위 여부까지 의심받게 됐다.

 사무라고치의 고백이 있은 뒤 일본 언론과 인터넷은 이를 주요 뉴스로 다루며 속보를 이어갔다. 특히 그간 뉴스와 ‘NHK 스페셜’ 프로그램 등을 통해 그를 영웅으로 조명해온 공영방송 NHK는 충격에 빠졌다. NHK는 이날 “사무라고치가 1996년 영화 음악을 작곡할 때부터 돈을 주고 대리 작곡가를 써온 것으로 확인됐다”며 “사전에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사무라고치의 고백 수시간 뒤 실제 작곡가를 자처한 이가 보도자료를 돌렸다. 니가키 다카시(新垣隆)라는 이름의 대학 음악 강사는 “18년간 대리 작곡한 것을 공식 사과하겠다”며 6일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했다. 슈칸분슌 보도 역시 이 작곡가의 폭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파문의 불똥은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일본 남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 다카하시 다이스케(高橋大輔)에까지 튀었다. 사무라고치의 바이올린 소나티네를 쇼트 프로그램에서 쓰기로 했는데 대리 작곡가의 작품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일본 피겨연맹 측은 이날 소치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다카하시가 마음에 들어 선택한 곡이라 이번 일로 동요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대회를 불과 며칠 앞두고 곡을 바꿀 수 없는 난감함이 묻어났다.

 일본인들은 충격과 함께 실망감을 드러냈다. 도쿄의 한 시민은 “인간의 저력이 참 대단하다 느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무라고치의 앨범을 발매한 일본 콜롬비아는 성명을 통해 “경악과 동시에 분노를 느낀다. 음반사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깊이 사과 드린다”고 발표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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