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4)<제37화>고려인삼(3)/임현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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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려인삼의 종자는 전통적으로 춘파하던것을 40여년전부터 추파로 바꾸었다.
임관식씨라는분이 일본농촌을시찰하러 갔다가 백추(배추)뿌리를 가을에 심는것이 발육 성장에 좋은것을 보고 인삼종자도 처음으로 추파를 시험했다.
그 시험결과가 좋아 지금은 인삼종자를 1백% 추파케 된것이다.
일본에서는 삼종을 가을에 뿌리는 전통 때문에 묘삼을 본포에 이식시키는 시기도 가을로잡고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묘삼의 본포이식은 아직도 춘이식이다.
전매국 개성출장소당시 인삼경작허가는 조건이 까다로왔다.
당시돈으로 5만원∼6만원이상 재력이있고 인삼경작에 경험이 있어야 경작허가를 받을수 있었다.
처음 경작허가를받는 사람에게 무슨 경험이 필요하겠느냐 의심이 나겠지만 경작허가를 내고싶은사람은 어떤 삼밭에서든지 관리인으로 또는 동업인으로 경작경험을 가져야됐다.
전매당국은 조사를 철저히 한다음 경작허가를 내주었기 때문에 1년에 허가를 맡은사람은 2∼3명정도밖에 안됐다.
개성출장소 초창기에 경작허가를 맡은사람이 1백40명에서 해방직후에는 4백여명에까지 달했다.
이중에는 일본인 경작자 20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촌용차낭·중전귀웅·구야장 등이 비교적 많은 삼발을 가졌던것으로 기억이된다.
이중에서 목촌은 한·일합병직후 입국하여 개성대화정에 목재를 비롯, 비료·철물·삼밭용왕대 수입상까지 차릴만큼 거부였고 큰 인삼상회도 경영했으며 주로개풍·장단등지에 삼밭을 가지고있었다.
중전역시 개성남본정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며 개풍군에 1천5백평의 삼을 심었고 구야(현재 일본 구주에 생존)는 대화정에서 고려자기상회를 경영하며 장단에만 1천평의 삼밭이 있었다.
이외에 복지현일(현주소 일본장기시)·강전부삼낭·구보전공등이 삼전주였다.
개성 삼은 경작기술이 앞섰기때문에 형체가좋아 홍삼의 원료에 적합했으므로 우량개성삼은 일정한 경작구역을 정하여 거기서 산출되는것만을 홍삼원료로 썼다.
즉 처음에는 홍삼전매법, 그 다음은 홍삼차매령에따라 인삼특별 경작구역을 지정하여 특별경작구역안에서 생산되는 수삼만으로 홍삼을 만들어 정부에 납품하였다.
일제에 인삼경작실태를 보면 1910년 경작면적 40만3천평이던 것이 1920년에는 4배인 1백78만7천평으로 늘었다. 그후로는 약간 경작면적이 늘기는 했으나 일제말기대까지 크게 늘지는 못했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뒤이어 1945년 태평양전쟁으로 홍삼의 주요 소비지였던 중국대륙이 전란에 휩쓸려 삼사업이 정체된 때문이었다.
재배·채취된 수삼은 배상가격제도에 따라 수납되었다.
경작자는 대개 인삼밭 1평에서 수삼 3백∼3백70g씩을 거두었고 잘된 삼밭에서는 7백50g까지 나왔다.
전매당국은 이 수삼을 홍삼원료로 쓸만한것이면 7백50g당 6∼7원씩 사들였다. 백삼으로만 쓸수있는 것은 7백50g에 값이 1원20전∼1원50전씩 했었다.
경작자들은 매년 9월13일부터 10월13일사이에 6년근을 채굴해서 전매국 개성출장소 건물서쪽에있던 수납장에 몰려들었다.
싸리로 만든 광주리 1개에 20차씩(1차는 7백50g) 홍삼원료로 자신있는 것을 담아오면 일본관리가 감정했다.
감정관은 편급(크기)별로 감정을하였고 홍삼원료인은 삼수크기에따라 수납가격에 차이가 있었다.
수납에 통과되면 즉불로 인삼값이 지불되었으나 미리 융자금을 쓴 사람은 융자금을 공제하고 받았다.
당시 융자는 삼밭 평당2원꼴로 삼업조합에서 대주었고 1년에 이자는 두 번 물어야했다. 융자도 무턱대고 주는 것이 아니라 묘삼을 삼포에 심고나면 실지경작평수를 확인한다음 내주곤했다.
나중에는 전량 홍삼수출권을 도맡았던 일본의 삼정물산이 직접 융자를 해준일도 있다.
좋은 홍삼원료를 많이 생산할수록 수출고가 늘어 삼정측에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융자까지 해준 것이다.
인삼이 4년근째되던 해에도 융자가 가능해 연리3부 조건이었던 융자는 결국 2번 받을 수 있었다.
경작자중 일부는 융자를 못받아 사채의일종으로 유명했던 개성의 「시변」이라는 것을 썼다.
월리 1푼2리5모 조건이 었던 시변은 복리로 이자를 계산했다. 여기에서 「송도치부」라는 것이 유래되었다. 시변은 대개 전주(전주)가 현찰을 가지고 장날에 시장을 찾아가 땅문서같은 것을 담보로 돈놀이를하는 금전대차 방법이었다.
돈 시장인 시변리 시장은 금천과 설천이 유명하여 돈많은 개성사람들이 전주로 모였다.
이 외에도 개성에서 대부분 70리길인 삭령(경기), 신계·금교·남촌·곡천(이상황해), 이천 (강원) 등 6군데가 시변리시장으로 유명했다.
『개성사람들은 소학가 뎔되라고 찰떡을 먹으며 시장을 찾아 돈장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을만큼 절약과 검소한생활로 치부를 했는데 돈에관한문제에는 계산이 정확했다. 송방이라는것이 이것을 증명했다. 다른지방사람들사이에 사채문제로 시비가나면 개성사람들이 장사하는 곳 즉 송방을 찾아가면 정확한 판결을 내려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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