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독도 '격렬비열도'를 가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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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태안군 신진도 해양경찰 부두를 출항한 경비함 320함이 거친 엔진소리를 냈다. 선미의 태극기가 30노트(약 55.5㎞/h)의 고속함이 만든 하얀 물보라를 맞으며 휘날렸다. 대한민국 최서단 무인도인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로 가는 320함에 올랐다.

3개의 작은 섬이 새가 열을 지어 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격렬비열도다. ‘서해의 독도’라고도 불린다. 국토의 가장 서쪽(동경 125도 34분 29초)에 있는 무인도. 서해의 영해를 정하는 10개의 기점 중 하나다. 태안반도에서 55㎞ 떨어진 이 외딴섬을 기준으로 우리의 영해도 중국 쪽으로 볼록 튀어나왔다. 중국 산둥(山東)반도에선 268㎞ 떨어져 있다. 가거도(435㎞)나 이어도(385㎞)보다 가깝다. 중국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년 동안 무인도로 방치됐던 격렬비열도가 올해 다시 사람이 사는 섬으로 바뀐다. 지난해 유인화에 따른 예산 15억원이 편성됐다.

중국의 불법어업을 막고 향후 영해 관련 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곳을 지역구로 둔 새누리당 성완종 의원은 “격렬비열도는 독도 못지않게 안보 면에서 중요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며 “시설을 보완한 뒤 항만청 소속 3명을 배치해 영토지킴이 역할을 수행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속함을 타고 1시간쯤 달리자 멀리 3개의 섬이 보였다. 각각 동·서·북 격렬비열도다. 서격렬비열도부터 12해리(22.224㎞)가 우리 바다다. 청명한 날씨 덕에 중국 쪽 수평선도 또렷이 보였다.

중국과 영해를 맞댄 영토의 끝단 섬이 무인도가 된 건 1994년부터다. 김영삼 정부 시절 ‘작은 정부’를 명분으로 전초기지를 지키던 등대를 무인화했다. 그 뒤 20년간 사실상 버려져 왔다. 접안시설도 없어 큰 배의 정박도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섬에 상륙하려면 배에서 배로 옮겨야 했다. 해경대원들과 기자는 해상에서 10여 명이 탈 수 있는 소형정으로 갈아탔다. 해경대원들이 사선을 넘나들며 불법 조업을 하는 중국 어선을 단속하는 배다. 중국 어선이 파손되면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어 큰 배는 단속에 쓸 수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작은 배로 각종 흉기에 맞서다 지난 5년간 해경 2명이 숨지고 68명이 다쳤다. 기자에게 구명조끼를 입히며 승선을 돕던 한 해경대원은 “이 작은 배가 도끼나 삼지창으로 저항하는 중국 어선에 근접해 단속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며 “이 배로 우리 땅에 상륙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소형정으로 다가가도 섬에는 접안시설이 없어 배를 자연 암석에 밧줄로 묶어 놓았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바위 위로 뛰어내려야 했다. 배가 파도를 타고 위로 올라갔을 때가 점프해야 할 시기다. 그러나 기자는 타이밍을 잘못 맞춰 배가 내려가는 순간에 뛰어내렸다. 바위 위에서 넘어져 미끄러지는 기자를 먼저 올라가 있던 해경대원이 붙잡아 끌어올려주지 않았더라면…. 기자의 발 아래는 수심 60m의 바다였다.

"미끄럽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해경대원)

27일 오전 10시. 육지를 떠난 지 2시간여 만에 북격렬비열도에 상륙했다. 고속함이 아니었다면 근처까지 오는 데만 3시간 넘게 걸렸을 거라고 했다. 이곳엔 멸종위기의 매가 서식한다. 군데군데 야생동물의 배설물이 보였지만 매는 보이지 않았다. 섬을 동백나무가 덮고 있었다. 1990년까지 민간인이 고구마와 콩을 일구고 바지락과 굴을 잡으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이미 찾기 어려웠다.

학계에선 격렬비열도가 7000만 년 전 생긴, 국내에서 가장 오랜 화산섬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발 101m인 정상까진 15분여를 걸어 올라가면 된다. 섬의 정상에는 1909년 처음 점등된 12m 높이의 등대, 무인 기상관측 장비, 20년 전까지 관리원이 머물던 빈 숙소가 폐허가 된 채로 있었다. 숙소엔 몇 해가 지난 달력, 이미 오래 전에 디자인이 바뀐 과자 봉지가 널려 있었다. 전국 어디서나 휴대전화가 걸린다지만 여기선 통신사 3곳 중 1곳(KT)만 서비스가 됐다. 등대에 오르니 3개의 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국의 불법 어업을 감시하는 1500t급 군함이 서쪽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격렬비열도 부근에선 서해상에서 일어나는 중국 불법 어업의 60% 이상이 발생한다. 2012년 격렬비열도 앞바다에서 적발된 불법 어선만 1685척에 달한다. 이날은 대형 군함이 와 있어 중국의 불법 어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중은 96년 협상을 시작한 이래 18년째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중 해협의 폭은 400해리(740.8㎞)가 안 된다.

그런데도 각자 200해리(370.4㎞)의 EEZ을 주장하고 있어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중국의 주장대로 EEZ이 확정되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하게 된다. 이 때문에 양국은 중간지역을 잠정조치수역으로 두고 공동어업을 하고 있지만 중국 어선은 호시탐탐 영해를 침범한다.
320함의 상병용 함장(경감)은 “해역을 3개로 나눠 해경과 군이 지키고 있지만 해선만으론 한계가 있다”며 “격렬비열도가 유인화돼 감시 업무를 하면 영토수호 측면에서 전초기지로서의 의미가 생긴다”고 말했다.

올해 국회가 배정한 15억원으로 숙소와 시설을 정비하고 헬기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인력은 3명이 배치된다. 다만 국가정보원이 주관한 논의에서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해경 대신 해양수산부 인력을 파견키로 했다. 이들은 등대 관리 등 인근 해역 감시를 비롯해 무인 시스템으로 가동 중인 기상관측 업무 등도 겸하게 된다.

백령도와 흑산도, 격렬비열도를 잇는 '황사 관측벨트'가 생긴다는 의미다.

정확한 황사 관측을 위해선 상공에 풍선을 이용한 관측기를 올려야 한다. 무인도에선 불가능하다. 허삼영 대산지방해양항만청장은 “격렬비열도에서 관측된 황사는 3시간 안에 수도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유인도가 되면 관측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였다.

“서해권을 통과하는 거의 모든 선박이 격렬비열도 앞을 지나기 때문에 격렬비열도의 유인화는 대한민국의 관문을 스스로 지킨다는 의미가 있다.”

취재를 마치고 다시 소형정에 올랐다. 국토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점점 무인도가 멀어져 갔다. 그러나 몇 개월 뒤면 유인도다. 격렬비열도가 다시 태어난다.

격렬비열도=강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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