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제4장 관동지방의 한적 문화|제15화 벼랑에 걸린「원숭이 다리」(원교)(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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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경에서 정서 쪽으로 2백여 리 떨어진 곳에「원숭이다리」(원교) 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산리현대월시원교정인데「신쥬꾸」에서 국철중앙선을 타면 바로「사루바시」역에서 내릴 수 있다.
작은 시골 역이지만 이 지명은 이곳에 있는「원숭이다리」때문에 붙여지게 되었다.
이름은「원숭이다리」지만 이 다리가 생긴 후 줄곧 사람들만이 이 다리를 건너다녔다.
그 생김새와 건축양식이 특이하여 일본에서 3대기교의 하나로 손꼽히며 관광 순례지로 유명하다.
「원숭이다리」는 1천3백여 년 전 백제도래인의 기술로 세워졌다.
동경을 떠나 팔 왕자를 지난 전차는 골짜기를 굽이굽이 누비며 달렸다. 한 골짜기가 끝나면 또 한 골짜기가 눈앞을 가로막으며 한 계곡을 건너면 다른 계곡이 가로놓였다. 전차가「오오스끼」에 가까워질수록 차창의 경치는 더욱 오묘해갔다. 낭떠러지에 걸친 기슭과 기슭 사이를 거는 요리조리 아슬아슬하게 뚫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크고 작은 굴속을 지나「사루바시」역 바로 직전인 오택 역을 지나자 차창 좌우로 계 천이 까마득히 내려다 보였다.
이 계천은「후지」산록 산중 호에서 발원하여「원숭이다리」밑을 흘러 동경만으로 들어가는 강이다. 전차가「사루바시」역 바로 못 미쳐 계천 철교를 지날 무렵 오른쪽 차창에「원숭이다리」가 보인다고 하지만 어느덧 날이 저물어 희뿌 연한 음영뿐「원숭이다리」는 유감스럽게도 보이지 않았다.
「사루바시」역에 내린 때는 하오7시40분. 그러나 산골짜기 마을이라서 해가 빨리지는 지 사방이 분간 못할 만큼 어두웠다.
급행 차는 서지도 않는 작은 역이라 그런지 역 앞 광장도 볼품없고 가로등마저 띄엄띄엄 뿌연 광선을 조는 듯 뿌리고 있었다.
피로한 나그네들이 시골 한가로운 고장에서 느끼는 그런 만만디 한 여유 감에 충족되어 「사루바시」도 중요하지만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기로 했다.
역 앞「아스팔트」포장도로 옆에 꼭 구멍가게 만한 중국음식점이 있었다.「세계의 음식」이라는 중국요리도 일본에서는 일본식 중국요리가 되어 우리 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그런 중국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 구멍가게 만한 중국음식점에서 맛본 중국음식은 우리 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산동 식 중국음식이었다.
이상히 생각하여「짱궤」에게 물으니 산 동에서 우리 나라에 와서 살다가 일본에 건너간지는 10년도 안 된다고 털어놓았다.
그「짱궤」의 설명에 의하면 총각때 우리 나라에서 산동 요리법을 배워, 솜씨를 한껏 날리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계 화교색시를 얻어 이곳에 중국 집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동포라도 만난 듯 반가와 하며 탕수육·간 자장을 시켜 들었다.
이들 중국교포들도 산 동에서 한국, 한국에서 일본, 이렇게 요리를 통한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속에 새겨졌다.
그러나 1세 때는 한국식 중국요리로 돈을 벌겠지만 이들도 2세 때 가서는 역시 일본식 요리로 탈바꿈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뭉클 떠올랐다. 소위 요리법이 토착화되는 셈인 것이다.
우리나라 백제의 거장이 만들었다는「원숭이다리」도 전설로 아득히 전해내려 올 뿐 정확한 건축자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그 찬란한 건축솜씨가 1천3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는 이를 놀라게 하고 있을 뿐이다.
「원숭이다리」를 찾아가는 일행은 밤늦게 구멍가게 식 중국 집을 나와 한참만에「택시」를 잡았다.
『원숭이다리에서 제일 가까운 여관으로 태워다 주시오.』
운전사에게 요청했다.
운전사는 바로 옆 여관은 더럽고 나쁘니 외국 손님에게는 알맞지 않다고 친절한 체 설명까지 하면서 차를 어디론가 몰고 갔다. 약 10여분 후「태공 계」란 여관 앞에 닿았다.
방을 잡고 주인을 불러「원숭이다리」의 위치를 자세히 물으니 무려 15분 이상을 걸어가야 된다고 말했다.
운전사가 우리를 완전히 외국관광객이라고 먼 곳을 지정,「택시」값을 바가지씌운 꼴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비가 억수처럼 퍼붓고 있다.「텔레비전」에서는 남부·동부지방에 폭풍주의보가 내렸다는 소식이다.「레인코트」에 우산까지 받쳐들고「원숭이다리」를 찾아 나섰다.
계곡에서는 어느덧 물이 불어 시커먼 물줄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져 흐른다.「아스팔트」깔린 갑주 가도를 걸었다. 옛날에 갑주 가도는 서북지방의 유일한 교통 로로 험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깎아지른 절벽사이로 간신히 난 험한 산길이 이제는「아스팔트」길과 중앙고속도로까지 생겨 차량이 쉴 새없이 질주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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